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어떤 일이든 본질적 측면이 왜곡되면 그와 관련된 시스템 전체가 왜곡된다. 교육에 있어서도 이는 같다. 다만 교육이란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른 분야의 그것들 보다 더 크므로 오류가 있는 경우 그 범위 또한 더 클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그 존재의 목적에서부터 본질적인 왜곡을 겪고 있다. 근대의 제도를 바탕으로 포스트모더니즘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것처럼 움직임에 방해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미 여러 차례 본바와 같이 근대에서의 교육 혁명은 산업혁명기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업무이행능력에 도움이 되는 기초적인 내용의 숙지를 그 목적으로 했었다. 이는 학습자의 주관적 특징을 무시한 객관적 학습이행을 그 방법으로 삼게 했다. 이 당시에는 모든 생산공정에서 분업화되고 표준화 된 업무를 교본에 맞게 이행하는 것만이 노동자들의 업무능력의 평가기준이었다.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Taylor)에 의해 창안된 '과학적 관리법(Talor System)은 이렇게 생산성의 극대화만을 고집한 채 현장에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산업혁명기의 교육은 형식과 방법의 객관적 확립을 통해 그 효과를 계량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하는데 주력했던 것이. 주관적 측면에서의 가치는 단순한 교육내용과 큰 연관성이 없었다. 감성이 인간의 존재가치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며, 주관적 측면의 배려가 빠진 교육방법으로는 삶의 수단을 보장하지 못하는 시대가 오자 기존의 근대적 교육체계는 곧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동시대이다.    
  교육은 추상적이며 본질적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회제도의 인프라이다. 따라서 교육제도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존재자체에 의문부호가 따라다니게 된다. 현대교육이념은 삶의 수단의 확보에 그 본질을 두지 않는다. 현대는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한 정신적 허전함을 해결할 수 있는 내면의 논리를 필요로 한다. 이 논리에 이성적 측면뿐 만 아니라 감성적 측면도 버무려져야 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고의 크기와 비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능력의 크기가 바로 그 사회나 국가의 경쟁력이 크기이다. 그리고 이것의 크기를 공공부문에서 극대화하려는 제도가 바로 교육이다. 현재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시스템이 미래가치를 갖기 위해서 고려되어야 할 측면이 바로 이 점이다. 따라서 교육은 철저히 학습자 위주여야 한다. 학교와 교육자는 교육에 대한 학습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물적 그리고 인적 요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학교나 교육자가 교육독점자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이상 교육의 미래는 없다.
  이 세상 지식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학습자 스스로가 가진 여하한 측면의 관심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알게 하고자 하는 여하한 지식으로도 연결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기타를 치고 싶다고 해서 단순히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로 낙인찍어버리는 대신 그 특성을 이용해 기타의 각 부분의 명칭과 그 명칭의 유래 그리고 기타의 역사 등을 소재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기본원리는 수(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는 가장 기본적인 틀에 음악이 위치한다고 믿었다. 현의 길이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법칙은 정확히 수로 표현할 수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음의 높이와 현의 길이가 갖는 상관관계를 통해 수많은 지식을 그것도 2500년 전에 알아내었다. 현대에서 음악을 하면 공부를 안 할 것이라는 확고한 명제는 아무 타당성이 없다.
  교육시스템이 학습자 위주로 바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학습내용과 관련된 체계이며 동시에 이를 이해하는 인적 구성이다. 교과서는 학습자들이 공부해야할 항목으로서의 가치만을 가질 때 가장 좋은 형태가 나온다. 즉 아이들이 공부할 내용을 확정할 수 없을 때 이를 안내하는 가이드일 뿐이어야 한다. 교과서를 학습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학습내용이 빠진 암기서로 전락한다. 교과서는 학습의 조언자이고 그 중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자 하는 내용은 학생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의 내면적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의 지식이 편향됨을 걱정한다. 지식은 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탑을 쌓기 위해 땅을 파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높은 탑을 쌓기 위해서는 깊이 파야 한다. 깊이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넓게 파면 지식세계는 근접해 보지도 못하고 세월만 허비한다. 처음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을 파고 그것이 깊이 들어가면서 자연히 넓게 파지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학습자가 자신의 선택에 의해 팔 곳을 정하고 학교와 교육자는 그가 선택한 장소를 효율적으로 파기 위해 어느 장비를 사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파야 빨리 팔 수 있는지를 조언할 수 있을 뿐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많은 시스템들이 이미 개발되어 있다. 다만 기존의 시스템에 익숙한 기성세대가 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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