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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세이- 손자의 눈물
동양에세이- 손자의 눈물
  • 김다린
  • 승인 2017.03.07 2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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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린 <수필가>
 

최근 일본 전통씨름경기인 스모대회가 새해를 맞이하여 막을 올렸다.

도쿄 국기관이라는 스모 전용경기장에서 열리는데, 1월 두 번째 일요일부터 15일간 계속된다. 경기는 오전 8시경에 최하 등급부터 시작해서 차츰 중량급으로 이어지다가 오후 6시쯤 모두 끝난다.

그러나 중계방송은 마쿠우치(幕內)급(우리나라 백두급) 선수들이 등장하는 오후 4시를 기해 일본 NHK TV에서 진행한다. 시간 맞춰 NHK에 채널을 맞추자 경기장 안의 왁자한 소음을 깔고 첫 화면이 열린다. 제일 먼저 장내 아나운서와 선수출신 해설자가 인사를 한다. 그리고 경기의 이모저모와 선수들에 관해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그러는 중 카메라앵글은 빠른 속도로 경기장 안팎 곳곳을 훑어나간다. 모두 낯익은 화면들이다. ‘어~!’ 반가운 마음에 외마디가 터져 나오는 찰나, 카메라앵글은 재빠르게 도효(씨름판)로 내달린다.

드디어 오후 4시, 마쿠우치급 선수들이 등장하는 본 경기가 시작되었다. 동·서 양 진영에서 첫 번째 겨룰 선수들이 씨름판에 올라왔다. 마와시(샅바) 하나로 거대한 몸의 아랫부분만을 감싼 두 선수가 갖가지 기술을 구사한다.

선수들의 기발한 기술이 터질 때마다 관객들의 탄성도 함께 터진다. 1판 1승 냉엄하면서도 깔끔한 승부, 첫 경기의 결과는 이집트 출신인 오오스나아라시(大砂嵐)가 일본 가고시마 출신 치요호오(千代鳳)를 ‘불끈 들어 금 밖으로 내놓기’로 이겼다.

다음 번 선수들이 씨름판으로 올라올 때까지 잠깐의 짬을 이용해 카메라는 또 경기장 안과 주변 현황을 세세하게 소개하고 다시 장내로 되돌아온다. 내게는 피부로 느껴질 만큼 친근하고 그립기까지 한 풍경들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통증이 도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눈물자국 얼룩진 내 금쪽같은 손자의 얼굴이 TV화면에 겹쳐지던 것이다.

작년 이맘때였다. 새벽 도쿄 거리를 열 살이 된 손자와 70먹은 할머니가 숨차게 달리고 있었다. 도쿄 시내라지만 지하철을 이용할 구간도 아니고, 띄엄띄엄 나타나는 택시들은 모두 임자가 있는 상태이다. “선우야, 차라리 뛰자!” 자칫하면 어린 손자의 여행목적이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할머니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들판의 망아지처럼 깡충깡충 뛰어가는 손자의 뒤를 할머니가 어이 따르랴.

들숨 날숨 불규칙한 숨통을 움켜쥐고 얼추 20분은 달렸을까. 마침내 경기장 정문 앞에 도착했다. 시각은 새벽 5시, 예외 없이 문은 닫힌 상태이다. 입장권을 팔기 시작하는 8시가 되려면 차디찬 길바닥에 서서 3시간은 기다려야 한단다. 함께 대열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청장년층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70노구와 열 살 꼬마에겐 가혹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10대가 되었다고 우쭐대는 손자가 원하던 여정이 아니던가. 스모는, 특공무술을 배우고 있는 손자에게는 미지의 세계였을 터. 한번 구경하고 싶다는 녀석의 마음을 손자바보 할머니가 모른 척할 수 없어 결단한 여행이었다.

숨통 터지도록 달리고, 냉 바닥에서 기다린 보람이 있어 입장권을 샀다. 경기장 안은 무척 넓고 ‘만원사례’란 휘장이 걸릴 만큼 객석도 가득 찼다. 마치 콩나물시루이다.

씨름판에서는 오전 8시경에 최하 등급부터 시작했다는 경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녀석은 처음 본 스모경기가 신기한지 한동안 눈을 깜빡거리며 집중하더니 이내 엉덩이를 들썩였다. 열 살 아이의 정서로는 판이 바뀌고, 선수가 바뀌어도 모두 그게 그것이던 모양이다. 슬슬 경기장의 시설들을 기웃거리거나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게다가 할머니가 큰맘 먹고 사준 꽤 비싼 도시락은 맛없다고 밀쳐버렸다. 할머니는 화가 났다. 누구 때문에 일본에 왔으며, 어떻게 해서 들어온 스모경기장인가. 더구나 특제 도시락은 외면한 채 군것질거리를 꺼내다니.

처음으로 할머니의 화난 얼굴을 본 녀석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화장실에 가는 듯싶었다. 한데, 어랏! 녀석이 나간 지 2시간은 됐을 법하건만 돌아오지 않는다.

장내에 가득 찬 사람들 틈새 어디에서도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찾으러 나가려 해도 서로 엇갈리면 더 큰일일 테니 움직일 수도 없다. 이러다 귀한 손자 타국에서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그게 뭐라고, 무엇이 아깝다고 그 어린 것을….’ 별별 앞서가는 생각에 애가 터져 제자리 뛰기만 하고 있을 즈음, 눈물을 훔치며 녀석이 나타났다. 반가우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나라에서, 할머니를 잃고 얼마나 무서웠으면 싸나이(?) 처지에 울기까지 했을까.

일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날의 아찔했던 사건(?)은 현재형으로 남아 내 가슴을 옥죄고 있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녀석의 눈높이에 맞춰 멋진 여정을 준비하리라. 두고두고 손자를 울렸다는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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