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동양일보 편집상무)

김영이(동양일보 편집상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통화중 자동녹음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를 수사한 검찰과 특검에게 녹음파일은 수첩 못지않게 아주 유용한 단서이자 증거였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수첩에 깨알같이 적힌 내용이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청와대의 민낯을 노출시켰다면 녹음파일 역시 공소사실 입증자료로써 그에 못지않은 파괴력을 보여줬다.

그중에서도 검찰이 전 더블루K이사 고영태씨와 고원기획 대표 김수현씨의 통화 내용이 담겨 있는 녹음파일 2300여개를 확보했다는 보도에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 많은 대화내용이 녹음됐을까. 국민들은 불안했다. 혹시 내말도 녹음이 되는 것은 아닌지라는 의구심에 불안은 깊어만 갔다. 이 녹음파일은 김 대표가 휴대폰에 자동으로 통화가 녹음되는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한 지난해 1월부터 7월까지의 통화내용이다.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한 녹음파일은 29개일 뿐 나머지는 가족, 친구와의 통화나 영어연습 등 개인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라며 전체를 공개하라는 최 씨측 변호인의 요구를 일축했다.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녹음파일에 들어 있는 내용이 각종 범죄나 비리 등을 단죄하는 수사의 단초가 된다면 괜찮다. 하지만 검찰 주장대로 개인적인 통화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돼 있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인간이 기계에 예속돼 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거리 곳곳에 설치된 CCTV는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있다. 보는 눈은 없어도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CCTV는 어느새 범죄 해결에 일등공신으로 자리잡았다. 사생활 침해니 하면서 CCTV 설치를 반대했던 사람들도 이젠 CCTV를 받아들이고 있다. 중용(中庸)의 ‘감춘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조그마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고로 군자는 홀로 있는데서 삼간다’는 것을 생활화한 사람은 CCTV 정도야 장난감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바야흐로 통화중 자동녹음 시대다. 폴더형 핸드폰이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면서 강화된 기능 중 하나가 통화녹음이다. 스마트폰 초기에는 어플을 새로 깔아야했으나 지금은 전화 어플에 녹음기능이 추가돼 있어 자동으로 녹음이 된다. 한발 더 나아가 통화할때마다 일일이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 노래방이 생겨 전국민의 가수화가 된 것처럼 우리는 지금 자동녹음 대상이 됐다. 통화내용이 자동 녹음되니 좋은 점도 없지 않다. 바쁜 업무속에서 통화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할때나 불시에 중요한 통화를 하거나 구두계약 할 때 등등 녹음은 필요할 때가 있다. 특히 송사에 휘말려 주장이 엇갈릴 때 녹음만큼 중요한 해결수단은 없다. 따라서 누군가에겐 통화중 녹음이 카카오톡 문자처럼 업무메모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녹음은 필요한 경우에 한해야 한다. 통화중 녹음은 당사자와 통화 상대간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어서 우리나라에선 불법이 아니다. 코네티컷, 메릴랜드 등 미국 13개 주에선 쌍방의 동의가 없는 녹음은 불법이다. 또 애플 아이폰이나 캐나다 블랙베리 제품은 통화중 녹음 기능자체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통화중 녹음이 판치는 세상이다. 통화하면서 의도치 않게 무심코 던진 말이 개인과 가족, 직장은 물론 사회적 파문을 가져와도 좋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통화 내용을 녹음한다는 것은 불신이 깔려 있어서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또 다시 들으려고 녹음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달콤한 대화를 녹음해 둔 사람도 주변에서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는 이례적으로 휴대폰 촬영을 규제하고 있다. 법적 규제가 아닌 민간표준으로 강제한 것이지만, 2004년 7월부터 몰카 촬영을 막기 위해 휴대폰으로 카메라 촬영시 반드시 촬영음(60~68dBA)을 내도록 했다. 미국에서는 별로 없는 규제로 사생활 보호를 위한 우리만의 장치라 할 수 있다.

이쯤되면 휴대폰 촬영규제와 같은 통화중 자동녹음 규제 논의가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상대방 휴대폰에 자동 녹음된다는 사실은 끔찍한 일이다.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필요에 의해서 일부러 녹음한다면 막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통화되는 순간부터 저절로 녹음되는 사회는 불신과 불안감만 증폭시킬 뿐이다. 아무도 몰래 둘만 속삭이는 달콤한 말도 녹음되는 세상,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세상, 당신은 그런 세상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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