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선 시인.

(동양일보)요즘 유난히도 시의 구절들이 세세하게 읽힌다. 세상에 마음 기댈 곳 없어지니 그런가 보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을 때 어떤 사회학자가 우리의 현대사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만큼 큰일이라는 의미로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때 나는 죽음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었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으로부터 수십 권의 리스트들을 작성하여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면서 문학의 중요한 주제인 죽음이라는 테마에 대하여 다시금 짚어보는 기회를 만들고 있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죽음이라는 테마에 대하여 등한시 해 왔던 나에게 한 지인이 죽음에 관한 책을 몇 권 건네주었다. 문학이나 프로젝트에서도 사람들의 더 나은 삶, 궁극에는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환경으로의 개선이 가능할까가 항상 나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때였다. ‘인간의 행복한 삶’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 책들을 책상에 던져 놓고 며칠이 지났다. 겨울이 오면서 활동이 줄고 그제야 1권을 펼쳐들고 읽어가기 시작했다. 모 대학에 개설된 강의와 관련된 교재의 개론서였다.

몇 장을 넘겨가다가 나는 중요한 내용을 메모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을 테마로 하는 서적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나갔다. 개강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문학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전개해나가야 할 것인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목록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곧 바로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나는 이미 몇 권의 중요 저작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 충격파를 다소 줄일 수 있었다.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현대사의 또 다른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헌재가 정리한 탄핵소추의 사유 골자 5가지 중 ‘생명권 보호의무 위반’이 세월호 참사 7시간에 관련한 사항이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탄핵 심판 선고 기일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요즘 대부분의 국민들 마음은 이제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시위행태는 과격해지고 특검과 헌법재판관들에 대한 위협과 인신공격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또 누구는 대통령이 다 된 듯하고 있다는 보도가 실소를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흥분한 민심이 막말을 쏟아내기도 하는 비이성적 현실이 개탄스럽기도 하다.

전 헌법재판관을 지낸 한 변호사는 대통령 대리인단의 변론 태도를 지적하며 ‘재판을 받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며 ‘재판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면 감치(監置)도 고려했을 사안’ 이라고까지 했다.

이번 겨울은 따스했으나 우리 국민들에게는 매우 견디기 힘든 계절이었다. 다만 인동초의 정신으로 참아내는 그것이었다. 촛불 시위는 전 세계인들이 주목할 만큼 비폭력적이고 문화적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도 들려오는 뉴스는 매우 염려스러운 내용을 전한다. 국내정치가 진통을 겪고 있는 동안 중국에서는 사드 보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일차적으로 한국관광에 제동을 걸고, 그 결과 관광 분야뿐만 아니라 제주, 홍대, 명동 등 대부분의 상권이 심각하게 위축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내의 롯데마트 등 한국 투자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테러 수준이라 한다. 참으로 민생이 걱정되는 나날이다. 일본에서도 한국인 관광객들에 대한 테러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발생하고 있다. 와사비테러, 스프레이테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남의 나라 땅도 아니고 정치로부터 소외당한 국민들의 마음은 기댈 곳이 없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처럼 3월이 되었는데도 산야는 희끗희끗 눈으로 덮여 있다. 어서 꽃과 풀이 돋아나는 풍경을 보고 싶다. 분홍 복사꽃 들판을 건너오는 연초록 풀잎편지를 받고 싶다. 마음이 너무 앞질러 나가는 것일까. 얇은 옷소매 걷어 올리고 보라 수수꽃다리 가득 핀 공원으로 훈훈한 바람을 쐬러 가고 싶다.

조지훈의 완화삼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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