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조국과 고향 옥천 향한 ‘ 향수’를 노래한 시인”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정지용 시인을 '그리운 충청인' 시리즈 첫 번째 인물로 선정, 지난 1월 31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좌담을 열었다.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주간 김태창 박사)’는 ‘그리운 충청인’ 시리즈의 첫 번째 인물로 정지용 시인을 선정, 지난 1월 31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과 김영미 시인, 김묘순 수필가가 함께 한 이날 좌담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정지용 시인.

▷김태창 주간 “저는 일본 도쿄와 교토를 중심으로 일본 국내·외에서 27년 간 공공철학 대화 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만, 그 동안에 특히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기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에 교토대학, 도시샤대학 등 교토에 있는 대학들과의 교류가 많았습니다. 교토에는 불교사원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신자수로나 문화유산으로나 가히 일본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니시혼가지(西本願寺)에서 공공철학 특강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샤대학에 강연하러 갔을 때 본부 건물 앞에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감회가 깊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는 해마다 여러 곳에서 추모하는 모임이 열리고 일본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윤동주 시인의 시가 일본말로 번역돼 있기도 해서 널리 알려져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 중에도 ‘서시’는 아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한 번은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모임에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갔는데 제 친구인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가 기조강연을 했는데 그의 한국 이해가 광범위에 걸쳐서 철저하고 균형 잡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동주 시의 일본어 번역에 관해서 저 자신이 느낀 바가 일본인들의 번역과 다른 점이 화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서시’에 나오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는 부분이 네 사람의 다른 번역에 똑같이 ‘잎사귀에 일어나는 바람에도/나는 마음이 괴로웠다’고 되어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본 사람은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니까 그렇게 번역한 이유는 알겠지만 저의 한국어 감각에는 어딘지 미흡해서 ‘잎과 잎 사이에 일어나는 작은 바람소리에도 숨 막힐 듯 한 괴로움을 느꼈다’고 해야 그 뜻이 제대로 통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옆에 앉아 있던 외무성 고급 관료였던 일본인 교수도 동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은 같은 도시샤대학의 동문이고 두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가 돈독했고 나란히 시비가 서 있는데도 일본인들의 윤동주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정지용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한 이유가 무엇인가였고 지금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 자신은 적어도 윤동주와 비슷한 정도로 정지용에 대해서도 일본인들의 관심과 이해가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정지용 시인은 충북 옥천 사람이라는 점이 친근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서 앞으로 한·일 정지용 공동 추모 모임의 장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 후에 정지용 시인이 시와 산문에 옥천 사투리를 많이 썼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진솔한 정감을 느끼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쪽으로 주목하게 되었고 그래서 여러모로 알아보는 가운데서 김묘순 수필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지용 시인의 시와 산문에 대해서 처음으로 느낀 감상은 한 마디로 청신하고 청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저보다 훨씬 정지용 선생의 시와 산문에 대해 깊이 연구하신 두 분의 말씀을 듣고 다시 얘기를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김영미 시인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시를 철학으로 푸는 경우는 드물었어요. 특히 서양철학에서도 종래의 것과는 아주 다른 레비나스의 철학으로 정지용 시를 푼다는 것은 여간해서 생각하기도 어려운데 일찍이 아무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겠다-개신해 보겠다-는 뜻에 공감해 김 시인의 ‘정지용 시와 주체 의식(태학사, 2015)’을 열심히 읽었고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레비나스는 제가 공공철학 대화 활동을 해오는 동안 적어도 프랑스 철학에서는 가장 중시했던 철학자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철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나 언급되는 별로 알려지지 아니한 철학자입니다. 그런데 정지용의 시를 레비나스의 철학으로 풀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김 시인의 시도는 인문학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저에게도 청명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꼭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레비나스를 생각하게 된 동기와 레비나스를 통해 보게 된 정지용 시의 특색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영미 시인 “제 책을 높이 평가해 주셔 감사합니다. 실은 저는 서울 태생이에요. 대학에서 국문과를 졸업하고 2001년 남편을 따라 옥천에 내려오게 됐어요. 서울 토박이이다 보니 옥천에 처음 왔을 때 시골의 전원적인 풍경이 굉장히 좋더라고요. 옥천의 어디를 가든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걸려 있었는데 이 모습이 마음에 운명처럼 들어왔어요. 그런 느낌을 갖고 있는 중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에 들어가게 됐고 정지용 시인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으로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게 됐어요. 박사 과정에서 정지용 선생에 대한 연구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선생의 삶과 문학에서 전해오는 무게와 세상을 향한 고민의 흔적들을 문예사조라는 틀로 가둬 둔 기존의 연구들이 저에게 갈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고민에서 존재론적 사유에 대한 탐색으로 방향을 잡고 주체가 만난 세계에서 고뇌하고 열망했던 세계를 이어주던 수많은 ‘타자’로 그 테마를 정했습니다. 정지용 시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은 그의 시세계 전반에 걸쳐 주체의 의미와 관련된 존재론적 삶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시적 본질도 인간 이해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에서 출발해 그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의 모색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제 하에 정지용 문학에 드러난 타자와의 관련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인격성과 고유성, 인간 존재의 윤리적 의미가 함축된 타자의 사유만이 진정한 주체를 회복할 수 있다는 함의를 도출해 낸 레비나스의 견해에서 현실의 관계성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체성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항해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타자성을 지향합니다. 또한 인간의 고통과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인 인간 이해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전반적 이해에 바탕한 소통의 철학으로 궁극적인 자아의 실현을 타자관계에서 찾고자 하는 타자 지향적 삶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저는 이런 맥락이 정지용의 시적 고민과 닿아 있다고 판단했고 그 사유의 과정이 시 전반에 흐르고 있음을 파악했습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태창 주간 “시를 철학으로 읽는다는 것은 시도 잘 알아야 하지만 철학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 감히 엄두를 못 내요. 잘못 하면 시가 시 답지 않게 되고 철학도 어설픈 철학이 될 가능성도 있거든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음악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음악도, 시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음악과 시에 대한 그리움이 늘 저의 가슴 속 깊숙이 침투되어 있습니다. 정지용 시인의 시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서도 어딘가 억제되어 있었던 향수와 동경이 일깨워지는 계기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은 비록 현실이 어둡고 혼탁해도 그런 현실의 한가운데서 한줄기 청신하고 청아한 기품과 기질을 감지하게 해주는 것이 있어서 시가 그립고 산문이 그립고 인간이 그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시인으로 하여금 레비나스와 정지용을 연관 지어서 생각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김영미 시인 “정지용 시에 나타난 근대의 현상과 한국 근대적 현실에서 그의 고유한 범주와 질적 특수성으로 인식되는 주체의 형성과정을 타자성에 대한 사유에서 고민하면서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하나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정지용의 시세계를 서양철학으로 읽어내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그리고 두 번째는 주체와 타자라는 거대한 주제에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할 지의 여부였습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철학과 정지용의 시적 사유가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연대와 소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됐기에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는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만나는 타인의 존재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밝히는데 집중돼 있습니다. 정지용의 시적 사유도 인간 삶의 가치 지향

김영미 시인.

적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을 고민한 흔적을 시 전반에서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정지용의 시 의식은 주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정신에서 비롯되며, 그 실천적 의지의 발현으로 타자를 주체 구성의 중요한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의 문학에서 주체와 타자와의 존재방식은 존재론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이 공존하며 그 무엇으로도 동일하게 환원되지 않는 매우 광범위하고 모순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살펴보면 정지용 시에서 상실된 주체의 회복 과정은 인간의 고전적 가치인 진, 선, 미를 추구하는 인간 삶의 가치 지향적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의 과정이었습니다. 초기 시는 존재론적 삶의 가치를 지향하는 감성적 주체로서 향유되는 동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으로 모순된 정서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중기 시는 타자지향적인 윤리적 주체로 그 특징은 가톨릭 신앙의식에 바탕을 둔 고백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후기 시는 초월적 주체와 초월의식이 지향하는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발현되는데, 주로 ‘산’에 집중됩니다. 따라서 정지용 시에서 주체는 존재론적 삶의 가치를 지향하는 감성을 중심으로 윤리적 의지와 참된 진리 추구의 형이상학적 세계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의 사상과 의미들을 표출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이익을 초월한 참된 삶에 관한 물음에 응답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김태창 주간 “말씀하신 내용이 고도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나온 것인데 그것이 그저 그 사유를 단순 재생산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충분히 여과하고 체험, 체득한 과정이 심금에 와 닿습니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라든가 존재가 자기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은 여간 깊이 철학을 하지 않고는 그 경지에 도달하기 힘든데 어려운 난관을 잘 돌파했을 뿐만

김묘순 수필가.

아니라 정지용 시와 더없이 잘 어우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지용 시 가운데서 오래도록 저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1927년에 쓴 ‘향수’와 1931년에 쓴 ‘고향’입니다. ‘향수’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 활동을 하면서 쓴 것인데 특히 셋째 행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중략)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부분은 일본에 살던 때의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어서 완전히 공감을 느꼈습니다. 저 자신이 고등학교 학생이던 때 -그러니까 1954년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썼던 ‘나는 질그릇’이라는 시의 한 구절-‘나는 질그릇/하늘을 사모하는/질그릇이오’-과 서로 교향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라는 멋대로 생각해서 아주아주 좋아했습니다. 정지용 시인은 일본으로 가서 처음으로 이국적 정서를 느끼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다녔습니다. 시는 한국어로 썼지만 영어 공부를 하고 나중에는 영어와 라틴어까지 가르쳤다고 하는데 저 자신도 고등학교 교사로, 그리고 대학교 교수로 영어와 독일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던 적이 있어서 삶의 모습에서도 서로 비슷한 데가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한결 친근감을 느낍니다. 정지용 시인은 자신의 고향인 옥천에서 본 풍경과 일본 유학을 가서 교토의 가모가와=압천 중간쯤에 하숙을 정하고 위쪽과 아래쪽을 왔다 갔다 하며 강변의 정경을 보고 느낀 바를 시로 현상화 시킨 것이 몇 편 있지요. 가모가와 일대는 굉장히 아름다워요. 단풍이 천하제일이거든요. 그 강물에 아유라는 물고기가 많은데 배를 띄워 호롱불을 켜 놓고 친구와 함께 구운 아유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담화를 나누면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지복의 경지를 향유할 수 있습니다. 정지용 시인은 가난한 학생이었기에 그런 체험은 없었겠지만 그 자연의 아름다움이 고향인 옥천의 아름다움과 오버랩 되었을 것입니다. ‘흙에서 자랐지만 파아란 하늘빛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마지막에는 신에 대한 신앙으로 승화되지 않습니까? 정지용 시인의 영혼은 모처럼 만나서 알게 된 가톨릭에서도 참다운 안식을 찾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래서 영혼의 방황이 계속되지 않습니까? 늘 외롭고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바람처럼 표류하는 노마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는 구절에는 조국을 상실하고 자기가 자란 고향에서도 포근한 안정을 느끼지 못하고 외국을 떠돌던 정지용 시인의 고독하고 방황하는 영혼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1930년대로 가면 산문을 주로 많이 쓰는데 그 중 기행문에 외로운 영혼의 모습이 많이 드러납니다. 저도 오랫동안 외국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청주에 돌아와도 고향이라는 느낌이 없어요. 청주는 서울의 식민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서울 지향성이 강해서 고장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거든요. 먼 데 있을 때는 청주가 그리운데 막상 오게 되면 아주 낯설게 느껴집니다. 제가 여든 네 해를 살았지만 고향은 정다운 옛 고장이라기보다 언제나 낯선 타향처럼 느껴집니다. 좋게 말하면 새로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이 안 가는 거지요. 1902년에 출생하신 정지용 시인과 1934년 태어난 저 사이에는 한 세대의 차이가 있지만 똑같이 교토를 체험한 셈이지요. 그러면서 교토의 아름다움을 느꼈지만 정지용 시인은 주로 자연을 체험했고 저 자신은 문화를 체험했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교토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일본에 사는 저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을 보태주었거든요. 청주와 교토를 오가면서 청주를 교토처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정지용 시인의 마음속에도 우리나라를 일본처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영미 시인 “저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정지용 시인은 바다를 건너 일본을 접했는데 그렇게 바다를 건너서 일본으로 간 여러 시인이 있었지만 대부분 10대 초반에 건너가 모국어도 완벽하지 않았고, 정신적인 것도 확고하게 잡히지 않았어요. 하지만 정지용 시인은 20대 초반에 건너갔어요. 초반에는 설렘, 두려움이 많았어요. 신문물을 접해 우리나라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컸는데 막상 일본에 가보니 한국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괴로움과 고통을 마주하게 됐어요. 향수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1923년 휘문고에 재학당시 ‘요람’이라는 책에 먼저 썼다는 학설이 있는데 나중에 일본에 와서 이러한 경험을 함으로써 더 좋은 시로 거듭났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가서 나라를 바꾼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굉장히 힘들어 한 것으로 보여요. 이 때 바다를 소재로 한 시만 9편인데, 초기의 바다시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던 반면 나중에는 자살 충동, 괴로움이 느껴집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자괴감이 시에 드러나는 것 같아요.”

 

▷김태창 주간 “젊을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난생 처음으로 타자와 접촉하고, 이때까지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났지만 결국 비애와 고통을 겪고 돌아온 정지용 시인이 그 후에는 월북이냐 납북이냐라는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지요. 어떤 것이 정 시인에게 공평한 해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시 그가 처해있던 상황을 잘 살펴보아야 되겠지요. 당시는 결코 행복했던 시절이 아닙니다. 정지용 시인은 아들이 죽고 주변사람들의 죽음을 여러 번 겪다보니 여러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다른 세계를 향한 탈출과 변신에의 욕망=초월적 욕망이 생겼을 법도 합니다. 일본 유학에서도 갈 길을 찾지 못하고, 고향에서도 답을 찾지 못했으니 다른 세계에 가서 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깔려 있던 때 6.25전쟁이 일어나 거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습니다. 북한에 자의적으로 갔는지, 타의에 의해 강제로 갔는지, 이후 북한에서 어떤 삶을 살다 죽었는지 그것은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까? 일단 저는 정 시인이 옥천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 시인의 수필을 읽어보고 느낀 것이 그냥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옥천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지용 시인이 옥천에 대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김묘순 수필가께서 보내주신 논문이나 수필을 보면서 정지용 시인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으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정지용 시인을 연구해 오신 입장에서 정지용 시인이 옥천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묘순 수필가 “정지용 시인은 초기에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처음에는 1919년에 소설을 쓰셨는데 자전적 이야기에 그쳤습니다. 1923년까지를 1기로 본다면 휘문고 시절까지 에요. 그 시절 작품 활동을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타고르의 영향을 받은 시들을 주로 썼습니다. 2기는 대학 유학 시절인대요. 그때부터 생명에 대한 것을 많이 썼습니다. 시 ‘압천’, 산문 ‘압천’ 상·하 등 압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3기 정도가 되면 아예 방언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혼란스러움을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문학가 동맹에 들어가고 아동 문학 분과 위원장을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많은 오해를 낳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일제강점기를 청산하는 방법이 요구됐는데 어떤 사람은 변명을 하거나, 또 어떤 사람은 절필을 하거나, 또 어떤 사람은 문학계를 떠났어요. 정지용 시인은 견뎌내는 방법이 침묵이었어요. 정지용 시인은 1950년대 집을 나가 1988년 해금될 때까지의 공백기가 있어요. 그 때야 말로 정지용 시인을 둘러싼 침묵이 가장 심했어요. 제가 대학 전공이 국문학이었음에도 정지용 시인에 대해 배우지 못했어요. 해금과 동시에 그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됐는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지용이 항상 고향을 떠나고 있었지만 고향에 대한 것을 작품에 담았어요. 고향을 떠나 항상 고향이 그리웠지만 막상 고향에 돌아가면 또 다시 떠나고 싶은 그런 심경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정지용 시인의 작품들을 연구하며 ‘사탕개’라는 방언을 알게 됐는데 옥천 방언으로 못생기고 볼품없는 개가 사탕개에요. 산문에서는 이러한 방언을 중시했던 반면 시에서는 리듬을 중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띄어쓰기 하신 것이나 시론을 보면 리듬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운율이 모자란 부분에서는 붙여야 하는 조사를 띄어서라도 운율을 만든 것 같아요. 그렇다면 김영랑이나 박용철도 띄어 쓰고 있어서 당시에는 조사를 띄어 쓰는 것이 유행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작품을 찾아봤는데 그것은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정 시인이 몽땅 조사를 띄어 쓴 것도 아니었어요. 그의 시론을 보면 노래하는 듯 한 시를 써야 한다고 말하고 계시는데 그 말처럼 리듬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산문에서 조사를 띄어 쓰지 않고 있거든요. 운율이 모자란 부분에서는 조사를 띄워서라도 운율을 만든 것이 아마 시와 수필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에서도 일관성 있게 띄어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이러한 점이 충청도 사람만이 갖는 면모라고 생각했습니다. 정 시인의 가장 대표작품이 ‘향수’인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썼는지 연구된 것이 적어요. 아마 향수의 시상을 구축하게 된 배경에 옥천의 설화가 작용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옥천에 말 무덤이 하나 있어요. 임진왜란 때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여송이 이끄는 원병이 오게 됩니다. 이여송이 옥천을 지나다가 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고 자신이 타던 말과 자신이 쏜 화살 중 어떤 것이 더 빠른 지 시험을 하게 됩니다. 화살의 방향을 놓친 이여송은 화살 보다 늦게 달린 자신의 말에 화가 나 말의 목을 베고 맙니다. 그런데 그 순간 화살이 날아 와 나무에 박혔습니다. 이때 이여송은 ‘말이 화살보다 빨리 왔는데 죽였다’며 후회하고 흙을 쌓아 큰 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대청댐이 생기면서 이 자리가 묻혀버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어요. 이 무덤과 불과 10여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정 시인은 아마 어린 시절부터 말 무덤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놀았을 거예요. ‘향수’의 ‘넓은 벌’은 말 무덤이 있는 지용 생가 근처의 넓은 벌판일 것이고 ‘옛 이야기 지즐대는’은 옛 이야기를 전해 듣던 어린 시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또 ‘실개천이 희돌아 나가는’에서 실개천은 말 무덤이 있었다는 곳에 냇물이 2km정도 흐르고 있는데 그곳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러한 것들이 바로 정 시인이 충청도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태창 주간 “김 수필가께서 보내주신 논문에서 특히 ‘산문적 상황’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를 쓸 형편이 아니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그래서 시 보다는 산문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정을 뜻하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당시에는 정지용 시인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둡고 괴로운 시대 상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정지용시인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지용 산문작가가 되고 시론중심의 평론가가 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특히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이 1935년 이후 급격히 산문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요. 그 중에서도 특히 김 수필가에게 크게 어필되었던 산문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김묘순 수필가 “정지용 시인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 받을만한 삶이긴 합니다만 개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의 삶은 굉장히 불우한 삶이었어요. 어머니도 안계시고,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았고, 잘 살던 집은 가난해지고. 항상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고향을 가졌고, 결혼에서 아이를 낳았으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했어요. 역사도 그의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역사적 상황들이 그를 매우 힘들게 했어요. 당시 정 시인은 임화나 김기림처럼 싫음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시를 쓰기 보다는 산문에 몰입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1930년대 시집이 발표되고 나서 그 이후 거의 산문을 쓰게 됐어요. 1919년에 소설 ‘삼인’을 처녀작으로 발표할 당시 정지용은 시로써 문단에 입문하기에는 매우 복잡한 산문적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휘문고보 시절 이태준과 교우관계의 영향, 홍수로 인한 고향집의 몰락, 부친의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휘문고보 사태로 무기정학 처분 등 상당히 혼란스런 경험을 합니다. 또 1918년 민족자결주의 제창, 1919년 2·8독립선언서 발표와 3·1독립운동,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 그의 생애와 관련한 국내·외 사정도 복잡하게 전개됐어요.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데도 의지할 곳도 없는 시대적 상황의 전개는 정지용을 소설의 길로 내몰았던 것으로 보여요. 그는 매우 복잡한 산문적 상황 속에서 소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입니다. 정지용 산문이 급격히 쏟아지던 1935년 이후는 신사참배, 창씨개명, 문화 말살 정책, 태평양 전쟁,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 반포, ‘문장’과 ‘인문평론’폐간 등 국내·외의 상황으로 인해 시 창작이 쉽지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고 엘리트였던 정지용이 전시상황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쓰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친일시를 쓴다는 것이 후세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될 지는 정지용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생각에 시를 쓰기보다는 산문에 집중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시를 밀어낼 구심점이 약해서였든지, 내외부의 불편함에서 오는 고뇌였든지, 시에 대한 무게 중심이 기울 수밖에 없는 산문적 상황에 놓여 졌고 산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주간 “작가가 그대로 서술자가 되어 사실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 산문인데 정지용의 산문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김묘순 수필가 “정지용은 1919년 ‘서광’에 소설‘삼인’을 처녀작으로 발표한 이후 그의 행적이 묘연해진 1950년까지 4권의 작품집(‘정지용 시집’, ‘백록담’, ‘문학독본’, ‘산문’)을 간행합니다. 이는 재판된 것들과 ‘정지용 시집’, ‘백록담’에서 작품을 뽑아 간행한 ‘지용시선’을 제외하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지용의 문학 작품 발표 시기를 눈여겨보면 1935년 첫 시집인‘정지용 시집’이 간행된 이후, 시보다는 산문을 주로 쓰고 있었어요. 1941년 두 번째 시집인 ‘백록담’을 간행하면서 산문 창작이 소강상태처럼 보였으나 1942년부터 다시 활발한 산문 창작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자에 따라 갈래별 주장에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깊은샘의 ‘정지용 작품 연보’ 기준으로 보면 운문은 168편, 산문은 122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935년까지 운문이 132편으로 대부분의 시들을 이때 발표해요. 그러나 산문은 1935년까지 소설 1편, 수필 10편이 고작이죠. 그런데 1936년부터 산문 발표를 부쩍 많이 합니다. 이때부터 발표한 산문이 무려 111편이나 돼요. 이와 같이 정지용은 1935년 이후 급격히 많은 산문을 발표했습니다.”

 

▷김태창 주간 “정 시인의 산문은 처음에는 소설로 시작했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는 주변의 경험이나 여행 또는 사색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순수 수필을 썼습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그의 수필의 방향은 수필의 양식 중의 한 갈래인 시론, 즉 중수필로의 전환을 이루고 있어요. 물론 1945년 이후에 시론이 아닌 일반 수필을 한 편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정지용 산문의 분류와 특징, 그리고 그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예를 들어 개괄적으로 설명해 주길 바랍니다.

 

▷김묘순 수필가 “정지용의 산문은 소설, 수필, 시론(時論)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정지용의 산문을 소설, 수필로 보되 특히 수필 갈래를 서정적 수필, 서사적 수필, 희곡적 수필, 교술적 수필로 분류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해방 이후 산문 중 수필과 같은 교술 갈래이나 수필과는 성격이 상이한 시론을 들어 정지용의 산문 세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정지용의 처녀작인 소설 ‘삼인’은 그의 자전적 세계관을 표출시킨 성장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볼 때‘삼인’은 정지용의 체험이 짙게 반영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성장과정을 그리되 허구적 농도가 짙은 또 다른 인물의 성장과정도 형상화한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까지 정지용 산문은 수필이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이 수필은 네 갈래로 범주화할 수 있는데 첫째, 서정적 수필과 관련,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는 세계의 자아화로서의 수필입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이나 자연에서 느낀 감상을 솔직하게 주정적, 주관적으로 표현한 수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수필로는 ‘남유 제1신 꾀꼬리’, ‘평양 1’, ‘날은 풀리며 벗은 앓으며’등을 들 수 있어요. 둘째, 서사적 수필이란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이 있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로서의 수필입니다. 주로 일인칭 시점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수필이라 할 수 있어요. 이런 수필에는 ‘다도해기 이가락’, ‘다도해기 해협병’, ‘선천 2’등이 있습니다. 셋째, 희곡적 수필이란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이 없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있는 수필입니다. 이는 글쓴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체험한 어떤 사건을 생각나는 대로 서술하되 사건의 내용 자체에 극적 요소가 있어서 작품의 내용 전개가 다분히 희곡적인 수필입니다. 이러한 희곡적 요소를 보여주는 수필로는 ‘비둘기’, ‘평양 3’, ‘소묘 3’등을 들 수 있습니다. 넷째, 교술적 수필이란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이 있는 자아의 세계화로서의 수필입니다. 이것은 글쓴이의 오랜 경험이나 깊은 사색에서 이루어진 예지를 바탕으로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수필로 ‘우산’, ‘학생과 함께’, ‘꾀꼬리와 국화’등이 있습니다. 정지용의 해방 이후 산문은 시론(時論)에 속합니다. 수필에서 보여주던 인간과 자연에의 관심에서 거리를 둔 변주곡을 울린 셈이지요. 그의 시론은 주로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바탕으로 사회의식과 시대 비판정신이 주로 드러나는 중수필적 요소를 비교적 잘 갖추고 내면적 자아의 혼란스러움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순박하고 소박한 세계관의 소유자이기도 한 정지용은 좌우익의 이데올로기가 확실히 정립되지 못한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시론으로 표명하고 있어요. 이러한 시론으로 ‘여적’, ‘오무백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싸움’, ‘쌀’, ‘플라나간 신부를 맞이하며’, ‘동경대진재 여화’등이 있습니다.

 

▷김태창 주간 “저는 김 수필가만큼 정 시인의 산문을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읽은 것 가운데서 아직도 그 여운이 저의 시대적 상황적 요청에 부응하는 문제의식이나 문제 관심에 메아리치고 있는 듯해서 스스로 놀랄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산문이나 시론이나, 칼럼이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우리 민족은 식민지의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이념이라는 더 큰 굴레를 쓰게 되어 안타깝다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했던 점입니다. 저 자신이 일본이나 중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줄곧 말해온 것이 영혼의 탈식민지화요, 자유로운 영혼의 중요성인데 그것은 정치적, 법률적 해방·독립 체제정립이 이루어진 후에도 영혼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식민지상태에 묶여 있으면 진정한 민주화와 사회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진단이 어딘가 정지용 시인의 시론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어서입니다. 영혼이 자유로워야 시도 소설도 그리고 음악도 제대로 향유될 수 있는데 취직 최우선주의라는 신형 이데올로기에 지배되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과연 시나 문학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김영미 시인 “요즘은 서정시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즉흥시나 시대정신을 바로 표현하는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하지만 정지용의 시는 김소월, 한용운과 더불어 가장 많이 읽히는 시집이긴 하지요. 대학교 1학년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는데 이러한 문학에 대한 생각은 없고 단지 어떻게 취업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학교 다닐 때 시집을 늘 갖고 다녔던 저희 때와는 달리 요즘에는 교양적으로도 시를 가까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21세기는 비평가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시인이나 시집은 많지만 시 다운 시나 시인다운 시인은 많이 없는 것 같아요.”

 

▷김태창 주간 “옥천에는 정지용 시인을 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나요?”

 

▷김묘순 수필가 “정지용 시인의 삶을 이해하고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려고 관에서 먼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지역 사람들도 정지용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들 있고요. 거리를 지나가도 정지용 시인에 대한 것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도배가 돼 있어요.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정 시인을 모를 수 없을 정도에요.”

 

▷김태창 주간 “다행이군요. 제가 사는 청주에도 그런 기풍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 시인을 생각할 때 그의 작품에는 철학이, 특히 후기에 갈수록 동양철학이 용해돼 있기 때문에 문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아우러져 그의 삶이나 그가 겪었던 시대의 고통과 비애를 추체험함으로써 지역성과 인격성과 세계적 공감성을 동시에 성찰 체득하는 지역 인문학의 안목과 관점에서 정지용의 인간상을 새밝힘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와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 시인의 초기의 동요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에 쓴 많은 시들, 그리고 심지어 그 많은 산문, 그 중에서도 특히 기행문 속에서 청아한 시인의 청명한 영혼에서 불어오는 청풍(淸風)을 느끼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충청(남북)도의 기풍을 청풍명월로 상징화하는 경향이 있어왔는데 그것은 충청도의 자연이 남달리 맑고 깨끗하다거나 달빛이 유난히 밝다는 뜻 보다는 거기서 나서 자라는 사람들의 이상을 그렇게 표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은 지역 인문학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충청인문학은 청풍인문학으로 뜻매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가 정 시인의 시를 읽고 청아하고 청신하고 청명하다는 인상을 받은 데 있습니다.”

 

▷김영미 시인 “오늘 인간 정지용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 인간 이해 측면에서 다시 한 번 정 시인에 접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생긴다면 정 시인의 삶 자체, 인간적인 측면을 더 공부해서 인간 정지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 대한 조명이 아직 미비한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묘순 수필가 “제가 좋아하는 정 시인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어 기뻤습니다. 인간 정지용을 옥천을 너머 다른 도시로, 세계로 확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지용의 문학세계에 정확히 근접할 수 있는 자양분이 그의 산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 뿐만 아니라 산문으로도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해봅니다.”

 

▷김태창 주간 “오늘 두 분께서 청주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고 정지용 시인을 함께 기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조아라·박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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