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동양일보)81년 만에 동백섬이 거제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국방부 소유의 이 섬이 지난 3월 9일 거제시로 반환된 것이다.

1936년 일제는 주민을 강제이주 시키고 이 섬에 해군기지를 만들었다.

아직도 포대 4곳, 방공호 3곳과 포대사격 방향지시석 등이 고스란한 가운데 13여 가구의 주민이 유린당한 섬의 상처를 보듬으며 살고 있다. 1971년 지세포항이 국가 어항으로 지정 되어 남해안 최고의 명소가 되면서 동백섬은 관광개발과 이용이 자유로운 순수한 민도(民島)로 전환해 달라는 꾸준한 요구와 부딪치고 있었다.

동백섬은 길이 1.5km, 너비 0.5km, 해안선 둘레 3.7km이다. 장승포항에서 5km 쯤 떨어져 있어 배편으로 15분이면 섬에 발을 얹는다.

천천히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아픔을 어쩌지 못해 파도에 몸을 던져버린 가랑잎 같은 동백섬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배에서 내리면 친절하게 마중 나온 바이크와 해국과 털 머위 그리고 팔손이의 눈홀김이 찾는 이에게 가뭇한 정감을 던져준다.

쪽빛 바다로 치장한 민박과 횟집도 있어 나그네 유혹을 결코 잊지 않는다.

조선 세조 3년 1457년 “조라포 북쪽과 지세포 남쪽 산봉우리에 따로 후망을 설치하여 본진의 군인으로 윤번 후망케하라” 라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지세포봉수대 설치를 명하고 있는 것이다. 1469년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는 지사도(知士島)로 1760년 ‘여지도서’에서 지삼도(只森島)로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문헌에는 지삼도(知森島), 지심도(只心島)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숲이 울창하니 지삼도요 모양새가 마음심(心) 자를 닮았으니 지심도이며 선혈 낭자한 동백꽃이 반년간이나 피고지니 눈물 그렁한 사랑, 그 이름 동백섬이다.

윤후명의 단편 ‘팔색조’는 환상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그린 이 동백섬을 무대로 한 소설이다. 이 섬은 동백꽃이 피면 섬 전체가 빨간 심장처럼 타오르는 마음의 불꽃섬이 된다.

동백은 잎새로 지지 않고 통꽃으로 떨어진다.

땅바닥에 기진하는 동백꽃은 마치 선혈 낭자한 사랑 그 것과 무엇이 다르랴. 사람들은 잊혀진 사랑을 기억해보려고 이곳을 찾지만 실은 심장마저도 빼앗기고 돌아간다. 혹여 마음을 꽃잎에 빼앗기는 일이 사랑을 찾아내는 일은 아닐까. 지세포 곁의 옥포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경상우수영에 속해 있던 지세포진은 수군의 군영지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마침 1592년 5월 7일 옥포대첩에 참전했던 지세포만호 한백록은 이순신 휘하로 들어가게 되고 이 틈에 왜군이 지세포성에 들어와 지세포 망대를 새로 구축하여 임진란 내내 조선수군이 감시당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1952년 8월 24일 선조실록에 의하면 지세포만호 한백록이 왜적의 총탄을 맞고도 계속 진격하였는데 전투가 승리로 끝났을 때 그는 행복하게 죽어있었다. 종4품 이었던 그는 당상관인 정3품 절충장군에 책록되었다.

동백섬은 대마도와 48 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군사 요충지였다. 이종무 장군은 견내량에 배를 집결시켰다가 동백섬을 발진기지 삼아 대마도의 왜구를 징벌하였다.

대마도를 병풍처럼 가려주고 있는 동백섬의 조류에 전선을 올려 쏜살같이 대마도로 돌진한 것이다. 이 곳 또한 이순신 장군이 26척의 왜선을 분쇄하고 임진 해전의 첫 승리를 거둔 곳이기도 하다. 일본의 도고 사령관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측후하여 궤멸시켜 러 · 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곳도 바로 이 동백섬 앞바다였다. 그러나 후일 도고는 “영국 넬슨은 군신(軍神)에 비유될 수 없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 한 사람뿐이다. 이순신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 된다”며 이순신 장군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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