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헌법재판소가 선고요지를 낭독할 때 국민들은 피를 말렸다. ‘그러나’ ‘그런데’ 때문이었다. 헌재 결정문도 법원 판결문과 같이 최종 결론은 맨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에 이 접속사들은 국민들을 애타게 만들었다.

탄핵소추 자체 위법, 공무원임면권 남용, 세계일보 인사 압력, 세월호 문제 등에 있어서는 이 접속사가 박 전 대통령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TV 생중계를 통해 이 광경을 본 국민들은 탄핵이 기각되는 게 아니냐고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최순실씨가 국정개입을 하도록 허용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했다는 부분으로 넘어가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바로 ‘그런데’ 였다. 이정미 전 재판관은 “그런데 피청구인(박 대통령)은 최씨의 국정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며 “(박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하자 국민들은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지난 13일 퇴임한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박 전 대통령 파면선고가 있었던 지난 10일 출근길에 사용한 ‘헤어롤’이 화제다. 이 헤어롤을 둘러싼 해석은 분분했다. 얼마나 바빴으면 헤어롤을 풀지도 못하고 집에서 나왔겠느냐에서부터 헤어롤 두 개의 구멍이 8을 의미해 8대0 만장일치를 암시한 게 아니냐는 억측도 불러 일으켰다.

반면 아무리 바빠도 헤어롤을 머리에 달고 출근한 것은 여성으로서 단정치 못했다는 비아냥도 동시에 받았다.

그래서 헌재는 이 전 재판관의 헤어롤이 화제가 돼 입줄에 오르내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언론사에 사진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읍소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그러나 헌재의 우려와는 달리 사회 안팎에서는 “일에 헌신하는 여성의 참모습을 보여줬다”는 긍정적인 반향이 컸다. 심지어 AP통신에서도 “한국의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투영된 한순간이었다”고 보도하고, 국민들 사이에선 ‘파면선고 당일의 생생한 역사’라며 보관 여론마저 일었다.

이 전 재판관은 평소에도 출근길 차량에서 머리를 말아 부피감을 풍성하게 보여주기 위한 미용도구인 헤어롤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고 당일 아침 7시 50분쯤 헌재에 도착한 이 전 재판관이 깜빡 잊고 헤어롤을 빼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것이다. 탄핵심판 날만 아니었다면 그저 단순 해프닝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도야 어찌됐든, 헤어롤에 담긴 의미는 단순 해프닝 이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7시간에도 미용사에게서 머리 손질을 받았던 누군가와 달리 이 전 재판관은 출근길 차 안에서 직접 머리를 손질할 정도로 바빴고 그만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 실수가 그 누군가에겐 따끔한 일침이 됐을 거라는 그럴듯한 해석에는 머리가 끄덕여진다. 이심전심이랄까.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는 최순실씨의 사익을 위해 헌법·국가공무원법상 공직자 윤리 등을 위반해 대의민주제와 법치주의 근간을 훼손했다는 거다. 그러면서 이례적으로 헌재는 대국민 담화에서 진상규명에 협조하겠다고 해놓고 검찰과 특검조사도 응하지 않고 청와대 압수수색도 거부했다며 박 전 대통령의 ‘독선과 불통’이 탄핵인용의 핵심사유를 조각한 요소로 지목했다.

일각에서 ‘방빼’라는 험악한 소리도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파면후 이틀이 넘도록 청와대에 머물다 서울 삼성동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사저에 도착해 열광하는 지지자들에게 그가 보여준 모습은 보지 말았어야 했다. 탄핵반대 집회 참가자 3명이 숨졌는데도 그가 지지자와 친박 국회의원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는 전율이 솟았다.

박 전 대통령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파면후 나온 첫 반응이 ‘불복’이고 그것도 본인의 입이 아닌 대리인(민경욱 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분열과 갈등만 심화시켰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민과 맞서 싸우다 국민에 의해 파직된 박 전 대통령은 지금도 사저 안에서 “오래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기획되고 어거지로 엮여서 쫓겨났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누가 엮였다는 건가. 정작 엮인 이들은 최순실 일당이 쳐놓은 덫에 걸린 순진한 국민 아니던가. 상처받은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마음을 보듬어 주는 ‘품격있는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 힘이 드는가. 제발 천지분간 좀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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