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長崎)현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 이즈하라(嚴原)의 아리랑 마츠리와 역사민속자료관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됐지만 토쿠가와(德川) 막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초대 장군이었던 이에야스(家康)의 요청에 의해 다시 국교가 회복 될 수 있었다.
이에 의해 일본에 온 조선 사절단이 바로 조선통신사다. 1회부터 3회까지는 조선과 일본의 국교 회복과 강제연행자 송환 등 전후 처리를 목적으로 하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고 칭했으며 4회부터는 주로 신임 장군의 취임 축하를 위해 파견됐고 통신사로 불렸다.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파견됐고 매회 300~5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는 대규모 사절단이었는데 국방상의 문제로 한양까지 가는 것이 금지됐던 일본 측 사절단과는 달리 조선통신사는 대부분 에도까지 직접 왕래했다.
쇄국을 정책으로 삼은 에도막부로서는 유일한 정식 외교관계였기 때문에 엄청난 재정지출을 감수하면서도 19세기 초반까지 통신사가 파견됐다.
한편 통신사 일행이 끼친 문화적 영향도 적지 않아 한·일관계에 있어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 중 쓰시마번은 조선과의 외교 및 무역을 통해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특히 에도까지 조선통신사의 경호와 제반 실무를 맡는 등 한국과 깊은 인연이 닿아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현재 이즈하라(嚴原)에서는 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한 ‘쓰시마 아리랑 마츠리(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고, 또 ‘조선통신사 연고지 연락협의회󰡑가 결성돼 있다.
한편 이즈하라의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에는 초조본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600질,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 원본,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의 불상 등이 보관돼 있다.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알 수 있는 쓰시마 소우(宗)가의 종가문서(宗家文書)도  소장하고 있으며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그린 회권(繪卷)도 볼 만하다.
[주소] 나가사키(長崎)현 시모아가타(下縣)군 이즈하라마치(嚴原町)


-이즈하라(嚴原)의 세이잔지(西山寺)
쓰시마(對馬)섬 동남쪽에 있는 대표적 무역항이자 쓰시마 번주 소우(宗)가의 소재지였던 이즈하라(嚴原)는 북쪽의 사스나(佐須奈)나 와니우라(鰐浦)로 도착한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 본토로 건너갈 채비를 하던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 이즈하라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세이잔지(西山寺)는 일행이 묵던 일종의 객관이기도 했고 18세기 중반부터는 이테이안(以酊庵)도 이곳에 이전됐다. 이테이안은 막부에서 쓰시마번의 외교문서를 감독하고 조선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교대로 파견된 교토 고산(五山)의 승려가 머물던 곳으로 쓰시마의 외교승이었던 겐소(玄蘇)의 이름 이테이(以酊)에서 유래됐다.
겐소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일본국왕사로 한양을 다녀갔고, 이후 전후문제 처리와 통신사의 도일에 이르기까지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한 인물이다.
현재 세이잔지에는 돌담과 산문 외에는 옛 모습이 남아있지 않지만 이즈하라의 항구를 한 눈에 바라보면서 역사를 되새겨 볼 만한 장소이다.
[주소] 나가사키(長崎)현 시모아가타(下縣)군 이즈하라마치(嚴原町)


-이즈하라(嚴原)의 만쇼인(萬松院)
이즈하라(嚴原)의 만쇼인(萬松院)에는 조선과 책봉관계를 맺고 대조선 외교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던 쓰시마 번주에 조선 왕이 하사한 삼구족(三具足·향로, 화병, 촉대)과 조선통신사와 관련한 각종 자료가 있다.
만쇼인은 1615년 쓰시마 소우가의 20대인 요시나리(義成)가 아버지 요시토시(義智)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일종의 보리사로 입구의 문과 인왕상을 제외한 건물들은 1879년 중건된 것이다.
묘지에는 요시토시 이후 역대 쓰시마 번주인 소우가의 묘가 있는데 이는 가나자와(金澤)의 마에다(前田)가와 하기(萩)의 모리(毛利)가 묘지와 함께 일본 3대 묘지로 일컬어진다. 또한 토쿠가와 막부의 역대 장군의 위패도 봉안돼 있다.
[주소]나가사키(長崎)현 시모아가타(下縣)군 이즈하라마치(嚴原町)

-쓰시마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과 불상 및 종
고려판 대반야경(大般若經)은 쓰시마 북동부의 히다가츠(比田勝) 니시후쿠시(西福寺)에 전 600권중 587권 한권만 결본으로 전권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 절은 쓰시마 소우가 15대 하루야스(晴康)의 보리사로 통신사의 객관으로도 이용된 곳이다.
또 나가마츠시(長松寺)에는 현지정문화재인 11세기 초조본 고려판 대반야경이 있는데 이는 이키(壹岐) 안고쿠지(安國寺)의 동일판본인 31권이 없는 것과 비교하면 더 가치 있는 것이다.
한편 다구다마오니(多久頭鬼)신사에도 현문화재로 지정된 재조본 고려대장경이 있다. 상세한 전래 경위는 확인되지 않는데 그 중 대반야경의 경우 106에서 110까지의 5권을 수록한 1책만이 전해진다.
쓰시마 섬의 동쪽 중반부에 위치한 사가(佐賀)에는 15세기에 해적을 진압하고 조선과의 문인(文引)외교를 수립한 8대 소우사다모리(宗貞盛)의 보리사인 엔츠우지(円通寺)가 있다.
이곳에는 본존으로 우아한 모습의 약사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종루에는 여말선초의 것으로 보이는 1미터가 조금 넘는 한국종이 걸려있다.
쓰시마에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미네무라(峰村) 가이진(海神)신사의 신라금동여래입상을 포함해 약 80구의 한국계 불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메이지 때의 배불훼석 이전에는 이즈하라 하치만(八幡)궁에 8세기 중반의 신라종이, 가이진 신사에 856년명의 신라종이 있었다고 하는데 훼철됐고 현재는 13세기 중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을사연명(乙巳年銘) 고려 금고(金鼓)가 쓰즈(豆酘)의 칸논토(觀音堂)에 남아있다고 한다. 
[주소]다쿠즈타마진자(多久頭鬼神社): 나가사키(長崎)현 시모아가타(下縣)군 이즈하라마치(嚴原町) 쓰쓰(豆酘) 2429
사이후쿠지(西福寺):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対馬)시 카미쓰시마치(上對馬町) 히타카츠630
쵸쇼지(長松寺): 나가사키(長崎)현 카미아카타(上縣)군 카미쓰시마치(上對馬町) 긴(琴) 672

-쓰시마의 최익현 순국비
쓰시마는 나가사키현 소속으로, 부산에서 약 50km에 불과해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섬이다. 이 섬은 우리 선대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 민족과는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조선 초기 왜구의 근거지가 돼 몇 차례 정벌을 했으며, 조선통신사가 이곳을 거쳐 도쿄로 들어갔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 섬을 거쳐 조선을 침략하는 등 조선 침략의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06년 의병장 최익현을 비롯한 의병들이 이 섬에 유배돼 왔다. 유생들은 이국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단발을 강요하는 일본군에 단식으로 항거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고령이었던 최익현은 결국 그해 11월 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순국하고 말았다. 최익현의 유해는 백제시대 비구니가 건립했다는 수선사(修善寺)에 며칠 동안 안치됐다가 부산항으로 이송됐다. 수선사에는 이러한 최익현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최익현(1833~1906)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양평의 화서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고 1855년 23세때 과거에 급제해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관료 유생이었다.
특히 서원철폐에 반대해 대원군 탄핵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며 1895년 단발령이 반포되자 “목을 자를 수 있을지라도 머리는 자를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려 항일의병을 분기하게 했다. 1906년에는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체포돼 쓰시마에 유배됐다.
[주소] 나가사키(長崎)현 쓰시마(對馬) 이즈하라마치(嚴原町) 수선사(修善寺) 경내


-나가사키(長崎) 원폭 한국인희생자 추도비
나가사키 평화공원에는 ‘원폭조선인희생자’ 추도비가 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폭한국인은 약 7만명으로 그중 한국에 거주하는 피폭자는 2만~3만명이라고 한다.
1990년 4월 13일 서울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13명이 나가사키를 방문했다. 이들은 대부분 2차 대전 시기에 일본에 강제 징용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 당한뒤 귀국해 지금까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중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해 경기도 군포시에 살았던 양영철이라는 사람은 “피폭 순간 10m나 날아갔고 폭풍으로 오른쪽 고막이 터졌다”고 증언했다.
폭발 중심지에서 불과 2~3km 떨어진 지점에 있었지만 지하터널에서 작업 중이었기 때문에 목숨은 건졌던 것이다.
이들이 일본으로 간 것은 일본에서 피폭돼 사망한 한국인을 기리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점차 고령화 되고 있는 재한(在韓) 피폭자에 대한 보상을 일본정부에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주소] 나가사키(長崎)현 나가사키(長崎)시

 

-나가사키의 한국인 노동자 숙소 함바(飯場)
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이 투하됐을 당시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던 함바(飯場) 건물 가운데 몇 개가 남아 있다.
1982년 5월 니유후나마치(入船町)의 함바에 살고 있던 67세 남자가 원폭투하 당시에 대한 증언을 했다.
당시 이 부근은 모두 4개 동이었으며 이곳에는 처자를 포함해 약 40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1944년 무렵 이곳으로 왔으며 약 30명이 후쿠다(福田)의 매립공사장에 일하러 다녔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 독신 인부들의 숙소였다고 한다. 함바는 종전 이전 일본에 연행된 한국인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로서 일본 열도에 널리 분포돼 있었으나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많지 않다.
[주소] 나가사키(長崎)현 나가사키(長崎)시 니유후나마치(入船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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