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규 <시인>

임연규 시인

제자인 향곡 스님이 스승인 운봉 스님께 돌아가시기 한 열흘 전에 “스님께 입적하시는 날은 어떤 날입니까?” 하고 물으니 “토끼 꼬리 빠지는 날이니라” 했단다.

향곡 스님이 다시 묻기를 “스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저희들은 누구를 의지하리까.” 하자 운봉 스님은 오른 손으로 자리를 치며 육자배기를 읊었다.

“저 건너 갈미봉에 / 비가 묻어오는 구나 / 우장 삿갓 두르고서 / 김을 매러 갈거나” 하고 편안히 누워 숨을 거두려하거늘, 향곡 스님이 급히 스님을 부르자 “날 불러 뭐 하려고” 하면서 대자유인이 해탈하여 열반에 드니 그날이 음력 2월 30일이다. 정월은 호랑이 달, 2월은 토끼 달, 삼월은 용의 달이니 이월 그믐 날 열반 하셨으니 토끼 꼬리 빠지는 날이다.

평범한 우리 일상생활에는 없는 생소한 날이다. 을유년 2005년 4월 8일(음력 2월30일) 새벽 산하는 산유화가 흐드러질 때 아버지는 노환으로 짚불이 조용히 사그러들 듯 생을 놓으셨다. 향년 84세였고 벽에 걸린 달력에 음력 날짜를 보니 전혀 생소하게도 음력 2월 30일이다. ‘2월 30일’이라니, 아버지 기일이 연관된 날이 아니면 잊힌 날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다음 해 새 달력을 받고 아버지 기일을 찾아 음력 2월 30일을 표시하려고 보니 어라, 음력 2월 30일이 없는 게 아닌가. 하여 음력 29일에 첫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몇 년 동안 2월 30일은 없었다. 그동안 2월 30일은 14년 동안 두 번이 지나가고 금년 정유년 2월 30일이 있다.

아버지는 1921년 신유 생닭의 해에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오형제 중 둘째였다. 할아버지는 믿기지 않게 딸은 한 분도 못 낳고 아들만 11분을 낳으셨다 한다. 이웃에 종친 할아버지는 딸만 10명을 낳아 애기만 낳으면 서로 웃음거리가 됐다고 하셨다.

아버지 11형제 중 다섯 분이 생존하셔 나이 차가 많이 나시는 큰아버지 사이에 형제분들은 어려서 잃고 아버지는 둘째분이 되셨다. 그 시대 망한 나라에서 태어나 일제 식민국의 백성으로 청춘을 보내셨고 해방이 되어 미군이 처음 주둔할 때 김포에서 미군부대 군무원으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영어도 제법 하셨다. 같은 부대 미군장교가 곧 전쟁이 날 테니 잠시 고향에 갔다가 전쟁 끝나면 오라는 권유로 고향에 내려오자 여름에 6.25가 났다.

그 장교의 권유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 했으나 외가와 할아버지의 만류로 뜻을 접고 일생 농부로 사시며 고향에서 7남매(2남 5녀)를 장삼이사 성장시키셨다.

아버지의 노환이 깊어갈 때 나는 생각지도 않은 지난한 세월을 견디면서 숙명처럼 따라붙는 시를 쓰며 위무하며 한때 동가식서가숙하며 지냈으니 나를 생각하는 당신 속내는 까맣게 무너져 내리셨을 것이다.

나는 아우의 연락을 받고 고향을 찾아 쇠잔해져가는 아버지 곁에서 속죄하듯 병수발을 하며 가을, 겨울, 봄을 맞이했다. 그때 아버지는 이미 시력을 잃으셨을 때다.

매일 목욕을 시켜드리고, 대소변을 받고, 진지를 떠 드리며 아버지의 말벗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치매가 살짝 오셔서 “연규야” 소리 한 번 해보라고 떼를 쓰시면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소리 ‘진주난봉가’를 몇 번이고 불러야 했다.

아침이면 나이 차가 많이 나시던 형님을 일생 부모님 대하듯 끔찍하게 위하신 당신 습관대로 나를 형님으로 알고 “아이고 형님 왜 이제 오시냐”고 인사를 하니 참으로 민망한 나날이었다.

어느 날 영양 주사를 맞기 위해 병원을 갔을 때다. 응급실 침상에 아버지를 눕히는데 느닷없이 “연규야, 나 사망원인이 뭐냐?” 하고 물으시니 간호원들은 키득키득 웃고 나는 아득해지는 서글픈 울음을 삼키며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주사실로 옮겨가는데 다시 한 번 물으신다. “나 이제 냉동실로 가는 거냐?” 아버지는 병원에서 타인들이 흔하게 주검을 맞이하는 과정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만큼은 그렇게 보내지 않으리라 결심했고 아버지는 가족과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듯이 새벽에 운명하셨다. 어머님 돌아가신 지 20년 되는 해였다. 당신 돌아가신 날 새벽부터 봄 가뭄을 해갈하는 비가 내렸다. 집에서 모든 장례 의식을 치르기로 하니 비 덕분에 일손을 놓은 마을 사람들과 장례 준비로 천막을 치고 조문객을 맞이할 음식을 준비하는 사흘 동안 모처럼 마을은 잔칫집 같았다. 하루를 내린 비는 봄 가뭄을 해갈하고 이후 장례일 동안 쾌청하고 따스한 날이었다. 아버지 사후 첫 윤달이 드는 해 4월 우리 가족은 산소에 부모를 기리는 비를 세웠다. 나는 일생 농부로 고향에서 선영을 보듬다 가신 당신을 위해 처음으로 쓴 ‘짧은’ 헌시로 비문을 대신했다.

“봄이 오면 흙을 깨워 일생 씨앗을 뿌리신 당신은 성자(聖者)이십니다.” (비문 전문) 토끼 꼬리 빠진 날 가신 아버지 기일, 올해는 2017년 3월 27일, 음력 2월 30일 제 날짜로 왔다.
<월·수·금 게재>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