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탈식민지화의 중심축이 될 충민과 청직의 충청인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주간 김태창 박사)’는 ‘그리운 충청인’ 시리즈의 두 번째 인물로 진천 출신 작가인 조명희를 선정하고 지난 17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그의 삶과 문학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김승환 충북대 교수,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 부국장이 함께 한 좌담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동양포럼은 오는 8월 14,15,16일 3일 동안 한국의 조명희,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중국의 루쉰을 함께 새밝힘을 하는 한·중·일 문학-철학대화모임을 개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조명희 선생은 해금이 된 지 얼마 안 되셔서 아는 분이 정지용이나 한용운에 비해 소수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선 조명희 선생을 널리 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본과 한국의 제가 잘 아는 열 분들에게 ‘조명희 전집’을 읽어 보시도록 간청했고, 읽고 난 후의 소감을 진솔하게 써 주십사 부탁 드려 그 열 분으로부터 감상문을 받았습니다. 이중에는 일본인도 있고, 젊은 학생도, 기성의 전문가도 있습니다. 그렇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른 관점에서 조명희 선생의 작품을 읽고 난 소감이 모아졌습니다. 이 글들은 동양일보(2월 27일자, 3월 6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들에게 조명희 선생과 각자 좋아하는 다른 작가와 비교하는 문장을 써 달라고 해서 동의를 받았고 4월 말 쯤 게재할 예정입니다. 세 번째로는 8월 중 광복절을 즈음해 사흘 간 조명희 선생과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중국의 루쉰 세 사람을 비교하는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가운데서 새롭게 조명하는 모임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전집을 일본 사람들에게 읽게 해 보니 예상 외로 반응이 좋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문인이라면 윤동주가 압도적이고 한용운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조명희 선생이야말로 일본이 다시 한 번 만나 진지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해서 저와 오구라 교토대 교수가 함께 교토와 청주에서 한·일 조명희 공동 추모제의 공동개최안을 협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조명희 선생에 대한 문인으로서의 위치 설정과 의미 부여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저 자신의 문제의식이 있고, 일본과 한국에서 인식을 같이 하는 몇 사람이 있어서 잘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우선 오늘 저희들이 모여서 조명희 선생의 사람됨과 생애, 사상, 업적에 대한 말씀을 자유롭게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조명희 선생이 어떤 분이고 어떤 작품을 남기셨고 그 분을 기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자유롭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 부국장께서 조명희 선생의 생애와 인간상에 대해서, 김주희 교수께서 작품과 업적에 대해서, 김승환 교수께서 인간과 작품과 남기신 메시지에 대해서, 그리고 권희돈 교수께서 연구와 인식 조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선우 작 ‘아무르(흑룡)강의 천명수(天命樹)’.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 부국장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 수암마을에서 출생한 포석 조명희 선생은 1938년 5월 11일 소련에서 일제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총살형을 당할 때까지 44년의 길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석을 2017년 현재로 불러들여 재조명하고자 하는 까닭은 그의 삶과 문학과 사상과 인간적 면모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포석이 초등학교 과정인 신명학교에 들어간 것은 다섯 살 때인 1898년입니다. 14세이던 1907년 민식과 결혼하고 1910년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하게 됩니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당시 진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돼 투옥됐고,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출옥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포석의 이름이 등장하는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는 않은데요, 제가 포석 평전을 쓰면서 추론해본 결과 3월 15일 진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포석이 주도적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제가 작성한 자료를 보면 3월 15일 진천서 ‘보통학교 학생의 시위기도’라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포석은 같은 해 9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동양대 동양철학과에 입학합니다. 1921년 희곡 ‘김영일의 사’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1923년 동양서원에서 최초의 창작 희곡집으로 발간됩니다. 1921년 평생의 절친 김우진 등과 같이 ‘동우회’를 조직해서 조선 최초로 순회공연을 벌인 일도 그의 삶에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1923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귀국하고 이듬해 시대일보 기자로 근무하게 됩니다. 1924년 6월 15일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춘추각에서 발간하는데요, 이 시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시집입니다. 하나의 효시가 된다는 것,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은 미답의 길을 걷는 선구자의 길이기도 하지요. 1925년 카프의 창설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27년 포석의 대표작인 단편소설 ‘낙동강’을 조선지광에 발표합니다. 그리고 1928년 8월 21일 소련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일제의 집요한 사찰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죠. 다수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일제는 포석에게 강원도지사 정도의 고위직을 제시하면서 딜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민중주의자이자 문필가로서 일제에 가장 강도 높게 저항했던 포석 선생에게 그런 제안은 귀를 씻어야 할 정도로 치욕스런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1929년 륙성촌으로 강제 이주 당하면서 이듬해 륙성농민청년학교 조선어문학 교사를 맡게 되고, 이듬해 황동민의 소개로 그의 누나인 황명희와 재혼하면서 우스리스크로 이사해 조선사범학교 조선어문학 교사를 맡게 됩니다.1934년 8월 10일 러시아의 문호 파제예프의 추천으로 소련작가동맹원으로 가입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신문 선봉의 문학편집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1935년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작가의 집’에서 거주하는데, 이때가 포석의 생애에서 가장 부유한 시절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 18일 일제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쓴 채 KGB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뒤 이듬해 5월 11일 총살형을 당하게 됩니다.

 

▷김태창 주간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묶어 한 마디로 ‘조명희 선생’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이 있습니까?”

 

▷김명기 부국장 “포석 선생의 생애는 두 개의 키워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올곧음. 또 하나는 백성 사랑입니다.”

 

▷김승환 충북대 교수 “포석 조명희 선생은 강인하고 투철한 혁명가의 기질을 가진 소설가였습니다. 사실 소설가를 포함한 예술가는 모두 여리고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예술 활동을 하지요. 그러나 여리고 섬세한 감성의 내면에는 활활 타오르는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충북 진천 출신의 조명희 선생은 조선 민족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서 평생을 분투했습니다.”

 

▷김태창 주간 “조명희 선생은 충민(忠民:마음의 중심에 늘 민족이 있었음)과 청직(淸直:티없이 맑고 올곧음)이 잘 아우러진 충청인(忠淸人)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저는 어떤 산물이 나올 때는 시대적인 정황과 무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명희 선생이나 식민지 근대를 살았던 지식인들과 관련해 말씀드리면 그 시대의 정황, 즉 텍스트가 산출된 콘텍스트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치의 문제라고 한다면 식민지 근대라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보통의 나라들에서 근대는 반봉건, 반외세로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반봉건을 외세가 가지고 와요. 식민지 근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은 근대화의 과업을 해야 하는 의무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거죠. 근대인들에게 일본은 무엇이었을까요? 조명희 선생도 일본에 압도된 분 중 하나인데, 일본은 폭력자로 오는 거예요. 일본은 그렇게 왔는데 일본을 통해 오는 문물들은 너무나 새로운 것들이고 그동안 우리 사회에 없었던 것들이죠. 그래서 그 당시 지식인들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진 일본의 문화를 동경하게 되죠. 그런데 일본은 미워해야 하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를 고민하게 됩니다. 포석 선생의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고민을 행동으로 옮기신 분 같아요. 추진력이 강하신거죠. 연극, 시집도 그렇고 소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가는 거죠. 이 분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거죠. 이 같은 치열함은 문학 작품과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 분은 치열하게 삶에 대한 고민을 하려고 했던 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분이 얼마나 삶을 회피하지 않으려 했는지, 현실을 어떻게든 해결하려 애 썼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조명희 선생을 위대한 인물로 박제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어떻게, 무엇을 고민했는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승환 교수 “조명희 선생은 결코 무산자 계급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조명희 선생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시절도 있었고, 어렵게 지낸 적도 있으나 양반 계층으로 태어났고 지주의 집안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런 조명희 선생이 계급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식민지 상태에 놓인 민족의 현실을 고민했기 때문이고 그 현실 문제를 해결하자면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민지 노예인 조선인과 주인인 일본제국주의의 관계를 계급투쟁의 구도로 보았던 것입니다. 즉, 조선인은 모두 식민지민, 즉 노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와 비아의 투쟁’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조선민족인 ‘아’는 일본제국주의인 ‘비아’와의 투쟁을 통해서만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단재의 사상인데 조명희 역시 이런 투쟁의식 속에서 사회주의 소설가 조명희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혁명적 열정이 아니고서는 러시아 망명을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조명희 선생이 러시아로 간 것은 1928년 8월 21일 전후인데 이때는 프로문학 진영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였지요. 그의 대표작 ‘낙동강’이 발표되고 프로문학진영에서 찬사가 쏟아지던 바로 그때 조국을 떠난 것입니다. 이것은 불꽃처럼 타오른 민족혼의 격정적 분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격정은 낭만적이면서 혁명적이므로 혁명적 낭만주의 세계관입니다. 조명희 선생이 가족과 친지를 두고 갑자기 이국으로 떠난 것을 감상적 탈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거든요. 따라서 그의 러시아 망명은 새로운 민족운동의 조명희식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주희 교수 “조명희 선생에게 현실은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정적인 현실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보면 1921년 쓴 ‘김영일의 사’에서 새 나라를 제시하고 새 세계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까지 조명희 선생은 인간의 선함을 신뢰합니다. 현실 인식은 아직 여기까지는 관념적이긴 한 것으로 보입니다. 2년 쯤 지나 ‘파사’라는 희곡에서는 어떻게 돌아갈 것이냐의 한 방법론으로 ‘옛 나라’를 제시하거든요. 여기서는 인간의 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힘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 인식이 보다 구체화됩니다. 이 희곡은 새 나라와 옛 나라 두 개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새 나라는 지금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인거죠. 옛 나라는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기 이전, 우리가 이렇게 어려워지기 전의 나라를 말합니다. 조명희 선생은 옛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 분은 당시의 용어로는 잘 사용하지 않던 행복이라는 단어를 쓰셨죠. 그래서 새 나라와 옛 나라는 민중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다는 점에서 3.1운동 실패의 좌절감과 관련지으면 옛 나라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현실 비판을 한 것입니다. 두 작품 모두 결말에 나라를 지향하는데, 의미가 다른 거죠. ‘나’라는 주체가 가기를 꿈꾸고 희망하는 장소. 조국 해방이 실현된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렇게 본다면 포석 선생은 작품 초기부터 답답한 현실이 없어져야 된다고 말해 왔는데 해방을 통해 없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황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작품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당대 문인처럼 막연하게 조선이 다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뭔지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석 선생의 현실 인식이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이 분이 강원도 지사 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치욕으로 여겼던 것은 우리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인 거죠. 이 분은 해방돼야 하는 것은 자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행복을 찾아야 하는 방법으로 계급 해방. 민족 해방을 이야기 합니다. 이 분에게 행복은 자유와 관련되는 것이고 자유는 해방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게 여기서 안 될 때는 자유를

김승환 충북대 교수

본인이 만들어낼 수 있어야 되는 거죠. 이 분에게 고향이라고 하는 개념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의 시세계는 낭만성과 환멸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작품, 사람에 대한 신뢰, 공동체로 어울려 살아간다는 얘기하면서 현실과 사랑에 실망하고 현실이 개조되기를 바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시는 순간의 정서를 담아내고 수필은 그 작가 자신을 노출하는 글쓰기라는 점에서 이 분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데 수필에서 이 분은 정신적인 고향을 많이 얘기합니다. 고향은 이 분이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의 다른 이름입니다. 포석 선생에게는 간절히 원하는 세상이 있는 거예요. 이 분이 간절하게 원했던 자유로움이 있고 현실의 답답함을 잊는 곳이 바로 고향입니다. 이 분에게 고향은 미래적이고 건설해야 하는 개념입니다. 이 분의 문학작품을 관통하는 정신세계는 고향의 부재 의식인거죠. 부자연스러운 현실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죠. 내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가져 온 대상에게 향합니다. 이 분이 1924년 쓴 ‘집 없는 나그네 무리’라는 수필에 ‘소수를 말하지 말고 전체 무리를 놓고 보라’는 굉장히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소수는 잘 사는 사람들 이었겠죠. 일제 강점기의 문인을 얘기하거나 지사를 얘기할 때 가난했다고 해요. 당대의 수준으로 보면 절대적인 가난이 아니거든요. 일본에 유학을 갈 정도면 절대적으로 가난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선각자들이 추상적인 현실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본인들은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인 거죠. 그런데 현실인식이 구체적인 것이 이 분의 독특함입니다. 역사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전체 우리 속에서 ‘나’의 역할을 보는 것이 문학 작품이나 삶에서 생애 동안의 올곧음을 지킬 수 있는 정신적 기제가 될 수 있어요. 소설은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할 수 없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분의 소설 대부분은 지식인인 나의 환멸에서 출발해 무산계급의 고통을 형성화하고 공동체 아픔을 분석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결합으로 이를 넘어 서려 애를 씁니다. 1925년 ‘땅 속으로’라는 작품에서 화자는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데 먹을 것이 없는 절박한 생활을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관념으로만 인식할 수 있었던 밑바닥 삶을 체험하게 되며 절망을 느끼게 돼요. 그리고 ‘지하 몇 천 층 암골 속으로 가야 한다’고 부르짖게 되죠. 그 이후는 주인공이 바뀌어요. 정말 무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쓰게 되거든요. 그 주인공들은 몇 달씩 월세를 못 내고, 아픈 아이를 치료할 돈이 없어 아내에게 돈 있는 사람에게 가서 몸을 팔라고 합니다. 진짜 무산자의 이야기를 쓰게 되죠. 그리고 드디어 ‘낙동강’이 발표됩니다. 여기서 박성운과 로사가 집을 떠나요. 그런데 좀 더 강해지고 힘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 힘은 폭력적인 힘이 아니라 전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역량을 쌓아 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현실을 넘어 고향을 건설하러 떠나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 분의 소설은 탐색 소설입니다. 이 분이 얘기하는 대안적 삶의 공간에 대해 문학적으로 모색을 해 보는 거죠. 고향은 일반적 의미가 아니고 만들어가야 하는 이상향입니다. 이 고향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라는 미래의식이 문학세계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서 포석의 문학은 고향 찾기, 고향 만들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김태창 주간 “오늘 두 분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는 8월의 한·중·일 문학철학대화모임의 주제를 ‘영혼의 탈식민지화’라고 했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영혼의 식민지화 상태에서 벗어나지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 부국장

못하고 있어요. 외국에 의한 식민지화에는 민감한데 국내에서 벌어지는 영혼의 식민지화에는 둔감하고 무지한 것이 아닙니까? 영혼의 탈식민지화가 이루어져야 영혼이 자유로워지고 그래야 참된 자유와 행복이 실현된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그것을 일러 ‘고향 찾기’ 또는 ‘고향 만들기’ 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조명희 선생은 시에서 혼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습니다. 몸에 이어 혼마저 식민지화 되는 것에 대한 발버둥입니다. 또 하나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고향의 부재 의식입니다. 고향은 내가 낳아 태어나 자라난 곳이라는 전통적인 인식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서 세우고 만들어야 할 이상향이라는 거거든요. 이런 고향에 대한 해석은 처음입니다. 이 좌담 이전에 그리운 충청인 1호로 정지용씨를 했는데 정지용씨의 시 가운데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청주에 왔는데 고장 사람을 소중히 안 여기는 이곳의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그리워 고향에 왔는데 막상 와 보면 그리던 고향이 아니에요. 특히 고향은 있는 게 아니고 새로 만들어 세워야 한다는 말씀에 저도 공감합니다. 저는 그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저에게 있어서 한국과 청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고향=옛 고장이 아닌 신향=새 고장이고 그것을 찾아 헤매는 유목민=노마드라고 말해 왔거든요. 제가 많이 사랑하면서도 늘 정들이지 못해 내 나라와 내 고장은 결코 안식과 정주의 고장이 아니라 치열하게 모색하고 탐구해야할 고장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조명희 작가의 경우에도 그런 데가 있었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치열한 영혼의 공명을 느껴서 그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오늘 토론하는 인원은 적지만 체제는 잘 갖춰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김명기 부국장이 작가 중심으로 얘기하셨는데 작가 중심의 연구가 가장 실증적인 연구니까 그것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굉장히 세심하셔서 조명희 문학의 실증적인 연구를 하는 연구자로 적합한 것 같아요. 김주희 선생님은 작품론적인 입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김승환 교수께서는 종합적인 입장에서 조명희를 문학 평론적 입장에서 정리해주실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런데 저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연구가 작가론에서 작품론으로 올 때 두 가지 방향이 있어요. 작품 내재적인 연구 방법과 작품 외재적인 연구 방법입니다. 제가 볼 때 조명희 선생은 외재적인 연구가 월등하게 많다는 게 문제점인 것 같아요. 그 분을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로 규정해 버리고 사회주의, 민족주의의 잣대로 작품을 보니 작품이 한없이 메말라 보입니다. 실제로 그 분 작품을 보면 저항성이 있어요. 많은 지식인들이 그 당시 저항을 했지만 오래 견디지 못하고 배절하거든요. 그런데 조명희 선생은 저항성이 다양한 긍정에서 나오기 때문에 웅숭깊은 사상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조명희 선생과 관련해서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건전한 로컬리즘이에요. 저도 서울에 사는데 여기 와 보니 온통 서울의 식민지가 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서울은 중앙, 여기는 변방이라는 의식 상태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건전한 로컬리즘인데 서울의 문화와 충청의 문화가 등가가치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은 중앙이니까 훌륭하고 여기는 지방이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여기가 중심이 돼야 합니다. 충북대나 청주대 등 대학들에서 실제로 이 지역 분들의 문학에 대한 연구들이 참 소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조명희 문학관에서도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 조명희 연구 자료를 다 모아놔야 됩니다. 제가 문학관을 여기저기 아무리 좋은 데를 가 봐도 그 분이 쓴 작품만 늘어놓지 그 분에 대해 쓴 논문이나 서평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문학관이 빼빼 말라 버리는 거에요. 조명희 선생에 대해 연구한 자료들을 다 모아놓으면 그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조명희 문학관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이 작품이 그대로 있으면 물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독자가 읽으면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니 작품은 독자가 읽을 때 완성됩니다. 독자들이 쓴 자료, 연구, 서평, 드라마 대본 그런 것들이 전부 다 조명희 문학을 완성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보면 조명희 문학을 끊이지 않고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마련될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졌다고 하죠. 조명희 선생의 삶의 역사를 보면 도서관 하나를 짓고도 남을 스토리가 있어요. 그래서 한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수많은 이야기도 같이 죽는다고 하죠. 조명희 선생은 작품을 써 스토리를 발굴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태창 주간 “권 교수님께서도 청주가 서울의 식민지처럼 느껴지십니까?”

 

▷권희돈 교수 “그럼요. 그래서 청주는 청주 나름의 특성과 긍지를 가져야 된다는 거죠. 그것을 건전한 로컬리즘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건전한 로컬리즘의 중심축이 될 수 있는 분이 다름 아닌 조명희 선생입니다. 조명희 선생을 지방의 독자적인 가치와 긍지를 진작시키는 의식 전환의 중심축으로 읽고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김태창 주간 “아까 두 분 교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던 것에 보태서 권 교수의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대일본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았지만 그 후에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충청도와 청주시가 서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구나. 그래서 우리의 탈식민지화의 과정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긴급한 과제로 남아있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명희 작가야 말로 중심축이 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명희 선생을 오늘의 청주에서 기리는 것은 그 의미를 서로 이해하고 우리 세대만이 이걸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와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오늘 꼭 소개해 드리고 싶은 한 점의 그림이 있습니다. 21살의 김선우라는 여대생이 조명희 선생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하고 열심히 읽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제목은 ‘아무르(흑룡)강의 천명수(天命樹)’라고 제가 지어주었습니다. ‘하늘에 닿아 개체생명과 우주생명이 상관연동케 하는 우뚝 선 나무’라는 이미지입니다. 러시아의 아무르강에서 조명희 선생이 서서 느끼고 깨달은 것을 추체험해서 담은 것입니다. 이 나무를 보면 뿌리가 뽑혀 있습니다. 식민지 상황에서 뿌리가 뽑힌 백성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뿌리는 뽑혔어도 저 위에는 환한 광명이 있잖아요. 환하게 비치는 것은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나무가 뿌리는 뽑혔지만 똑바로 서서 빛과 열과 힘이 있는 고향 찾기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특히 제가 21살 아가씨치고 매우 천재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두 마리 용 때문입니다. 용이 투명하게 표현돼 있어요. 전집을 읽고 제가 가장 깊게 깨달은 것은 생명입니다. 조명희 선생은 뿌리 뽑힌 백성의 생명이 고갈되는 것에 대해 굉장히 걱정하셨어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생명을 소생시키면 언젠가 새로운 조국을 맞이할 때 거기서 더 생명을 북돋을 수 있지만, 생명이 고갈돼 버리면 정치적으로 독립된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거든요. 그래서 생명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특히 그 분이 가장 강조하려 했던 것은 민족혼, 민족의 근원적 생명력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양의 생명과 음의 생명. 여성적인 생명과 남성적인 생명이 아우러져 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 있고 미움의 생명이 있습니다. 긍정의 생명과 부정의 생명이 있어요. 일본은 우리를 정복하고 합병하고 식민지로 만든 악인 동시에 새로운 문물. 새로운 시대의 표상이라는 존재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당대의 지식인들은 한없이 동경하고 매혹되면서도 동시에 거부하고 저항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라는 학자가 얘기하는 이중 구속을 당하고 있었던 거지요. 한편으로 죽으면 한편으로 살고 한편으로 거기에 흡수되면서 한편으로 거기에서 이탈하고. 이 정경이 포석 조명희 전집에 아주 일관되게 나와요. 그런데 이 그림에서 용 두 마리가 하늘을 보고 올라가는 긍정의 생명력과 이것을 물어뜯으려는 부정의 생명력이 아우러지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요. 그런데 투명한 형태에요.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너지의 작용이지 어떤 개념화된 것이 아니에요. 어제 다른 곳에서 학자들과 이 그림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거기 계신 분들이 질문한 것이 왜 우주를 검은색으로 그리면서 윗부분에 붉은 색을 넣었느냐는 것이었어요. 우주는 원래 무기물의 집적으로 생각해 왔지만 최근의 우주 인식은 생명 우주=바이오코스모스라는 쪽으로 변하고 있거든요. 무한한 생명력이 영원히 작동하는 게 우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죽음의 우주로부터 생명의 우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겁니다. 조명희 전집에서 그 여대생이 읽어낸 겁니다. 그리고 잘 보시면 8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8자는 무한대(∞)를 표시하는 겁니다. 이것이 한 시대, 한 지역, 한 세대에 끝나지 않고 연장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바탕색이 모두 새까맣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중앙에 있는 천명수가 강인한 생명의 복원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의 생명관과 한국 사람의 생명관이 다른 것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일본 사람은 대지의 힘으로 지탱되는 생명이라는 생각이 주류를 이룹니다. 반면 한국 사람은 하늘에 닿아야 생명이 소생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은 뿌리가 뽑혀서 완전히 죽였다고 일본인들이 생각했지만 안 죽었어요. 온통 뿌리가 뽑혔어도 하늘에 닿으면 생명력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왜 낙동강이 아니고 아무르강이냐. 이것에 대해 어제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낙동강’이 조명희 선생의 핵심 작품인데, 민족의 비극과 백성의 참상을 그렸는데 왜 아무르강이냐 하는 것입니다. 조명희 선생은 한국적 상황을 벗어나 그 당시 소비에트 공화국에 가서 인류의 미래를 꿈꿉니다. 더 풍부하게 돼서 낙동강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더 크고 더 강한 것을 가져야 하잖아요. 조명희 선생은 새로운 미래를 낙동강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훌쩍 떠나 아무르강으로 갑니다. 러시아에서 조명희 선생은 더 강해지고 더 깊어지고 넓어진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스탈린은 정치적인 속셈으로 기껏 개척을 해서 정착한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 시키지요. 그 과정에서 일본이 싫어 러시아로 망명한 선생을 일본의 스파이로 몰아 총살 시킵니다. 참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저같이 전혀 인연도 없고 문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이국에 있었던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동양일보와 인연을 맺어 일을 하는 가운데 조명희라는 이름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명관을 소중히 여기고 이 시대에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열이다. 빛이다. 열과 빛이 발휘가 되면 거기에서 힘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이나 종교, 문화가 열이 없다. 빛이 없다. 다시 일으키자”라고 말씀하신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소중한 메시지가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래요. 대학에서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사는 삶의 터전에서 한, 두 사람이라도 보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면 좋은 거지요. 여기 열사람이 그 책을 읽고 자기들의 마음을 글로 표현하고 이런 분들이 일본으로, 지역으로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저는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조명희 선생이 총살당해 절망의 한 구덩이에서 돌아가셨어도 우리가 선생의 뜻을 기리고 공감의 유대를 펼쳐간다면 조금이라도 그 분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원래 예술 작품은 그 것을 창조한 사람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작품을 여러 사람이 해석하는 과정에서 높아지는 것이죠. 예술 작품은 불확정성이 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무한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죠. 조명희 선생을 죽이느냐 살리느냐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대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서 수용, 계승, 발전시키는 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 자신과 젊은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조명희 선생의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김승환 교수 “조명희 선생의 삶에서 세대 간 공유 가능한 메시지는 대아를 위한 소아의 희생입니다. 1920년대의 우리 겨레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처절한 해방 투쟁에서 자기희생이 필요 했습니다. 조명희 선생은 단호하게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택했습니다. 문학을 통해서 대아인 민족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했습니다. 조명희 선생은 겨레의 아픔과 슬픔을 온 몸으로 견디면서 식민지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혁명의 가시밭길을 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시베리아 벌판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조명희 선생의 뜻과 아픔과 투쟁이 세대 간 공유가 필요한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김주희 교수 “이 분은 우리 근대 최초의 코즈모폴리턴입니다. 나라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나라를 가로 질러 갑니다. 이 분에게는 국가라는 틀보다 가치의 측면이 컸을 것 같아요. 가치를 쫓아 사는 삶인 거죠. 요즘처럼 이동이 많고 한 국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살기보다 옮겨 다니며 살 가능성이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이 분은 국경횡단적 삶의 선구자라고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권희돈 교수 “조명희 선생은 니체가 얘기한 초인 같아요. 신을 죽여 놓고 니힐리즘에 빠져 있는 세상에서 메뚜기처럼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찾아 떠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과거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새 가치의 창조를 위해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거지요.”

 

▷김태창 주간 “김승환 교수님께서는 포석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김승환 교수 “조명희는 시인이고 극작가이며 소설가이자 평론가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역시 1927년의 작 ‘낙동강’일 것입니다. ‘낙동강’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첫째, 문학적인 면에서 보면 전형적 상황에 놓인 전형적 인물을 창조했다는 것과 중편소설의 전범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지요. 둘째, ‘낙동강’은 1925년 결성된 프로문학운동의 방향 전환과 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낙동강’은 자연발생의 신경향파에서 목적의식의 프로문학으로 전환하는 상징적 작품입니다. 조명희는 조선민중의 고통을 묘사하는 동시에 민족해방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특히 계급투쟁으로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민족 해방의 방략이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조명희의 ‘낙동강’은 그런 프로문학의 방향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주희 교수 “저도 동감입니다. 굳이 사조와 관련지어 말하면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로 볼 수 있는 거죠. 이 분은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체제를 고민하다 사회주의로 간 것입니다. 이 분에게 전체 우리가 없다면 이념 자체를 위한 이념을 추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 소설에 카프 계열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살인, 방화, 강도, 강간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이 분의 독특한, 따뜻한, 현실에 절망하지만 희망을 갖고 있는 행동주의적 성향이 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인간에 대한 선을 종교적으로 신뢰했던 것 같습니다. 이 분이 러시아로 떠난 것도 내 생각과 내 작품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은 낙동강에서 실제로 자기 선언을 하기도 합니다. 러시아가 작품 속에 등장해요. 그래서 가서 실제로 고향이 만들어지는 지는 그 이후에 얘기가 될 수 있겠죠.”

 

▷김태창 주간 “제가 한·중·일을 왕래하면서 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철학대화를 계속해 오는 동안에 새삼스런 인식과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와 중국의 루쉰이 모두 나라와 겨레의 영혼이 서구문명에 의해서 식민지화되는 사태의 진전에 대해서 치열하게 항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데 공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를 여기에 비견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조명희 선생을 알게 되고 그의 생애와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이분이야말로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문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지향하는 인문학의 중심축이 되기는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그 분의 사람됨의 핵심적 특성이 충청인의 이상적 표징인 청풍명월의 정신-즉 충민과 청직의 기풍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운 충청인으로 기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오늘의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조아라·사진/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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