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鹿兒島)현
-사츠마의 다마야마신궁과 박평의의 묘

다마야마(玉山)신궁은 조선에서 온 도공들이 세운 곳으로서 단군을 주신으로 모신 조선식 건물의 신사였다고 한다.
1907년에 중건하면서 현재의 일본식 신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이 지역 도공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중요한 신사이다. 경내에 있는 에도시대의 중건비에는 기부자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한국식 성과 이름으로 돼 있다.
다마야마 신궁으로 가는 길 왼편에는 사츠마 야끼(薩摩燒)의 터전을 닦은 박평의(朴平意)의 묘가 있다. 사츠마 야끼는 이 지역의 다이묘(大名)였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 의해 주로 전라도 남원 지역에서 끌려 온 도공들이 개창한 곳이다.
1598년에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초기에는 토쿠가와 막부 성립이라는 정치적 격동을 겪으면서 정착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번주인 시마즈의 정책적 지원으로 현재 가고시마현 미산(美山)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집단 거주하면서 박평의를 중심으로 도자기를 굽기 시작하였다.
현재 사츠마 야끼는 다섯 계통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3개가 박평의를 비롯해 김해와 변방중 및 하방진 등 조선 도공들이 그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그들의 영향 속에서 일본의 도자기는 발전한 것이다. 한편 조선 도공인 전해(奠楷)에 의해 시작된 부젠(豊前) 우에노 야끼(上野燒)나 다카다 야끼(高田燒),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 의해 연행돼 온 팔산(八山, 高取八藏)이 발전시킨 다카도리 야끼(高取燒)도 큐슈지역을 대표하는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하다.
[주소] 899-2231 가고시마현(鹿兒島縣) 히오키시(日置市) 옥산신궁(東市来町) 미산(美山) 788
옥산신궁


-사츠마의 심수관의 집(沈壽官家)
사츠마의 심수관씨는 12대에 개발한 시로사츠마(白薩摩) 양식으로 유명해졌으며 14대 심수관씨의 활동에 의해 한국에도 알려졌다. 심수관씨의 본가에는 초대부터 시작하여 이 가문의 대표작품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다음 대의 후계자를 정할 때 물려준다는 한국의 망건은 초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이 가문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초대인 심당관(沈當官)은 여러 도공들과 함께 1598년 전라도 남원에서 끌려와 5년 후에야 이 곳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정착하였는데, 이 후 심수관가는 그 지역 번주의 보호 하에 무사와 동급의 대우를 받으면서 도자기를 생산하여 왔다. 한국식 이름을 계승한 심수관가는 현재에도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주소] 가고시마현(鹿兒島縣) 히오키군(日置郡) 히가시(東市) 이치키초(來町)

 

■오키나와(沖蠅)현
-오키나와의 한국인 위안부 위령비
태평양전쟁기인 1944년 오키나와현 토카시키지마(渡嘉敷島)의 ‘육군해상정신전대(陸軍海上挺身戰隊)’라는 특공대기지의 일본군 ‘위안부’로 종군했던 배본기(가명) 등 7명의 한국 여성을 추도하는 비석이다. 일본 시민단체의 성금으로 1997년 11월에 건립되었다.
위령비는 유구석회암(琉球石灰巖)을 삼각으로 쌓은 형태로 높이는 약 5m다. 카나카와현에 거주하는 도예가인 재일한국인 3세 마리코(伊集院眞理子)씨가 중심이 되었는데, 구상에서 완성까지는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집단자결이 이루어졌다고 알려진 이곳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배본기씨를 포함하여 2명이 살아남았다. 배본기씨는 당시 29세로 7명중 가장 연장자였다. 그는 당시 부산에서 약 70명의 여성과 함께 일본으로 연행되어 왔다. 그 중 50여명이 오키나와의 나하(那覇)항에서 분산되었는데, 다시 경양간제도를 거쳐 토카시키지마에는 배본기씨 등 7명이 도착했다. 그는 종전 후 오키나와에 잔류하여 1979년에는 외국인등록을 했으며 위안부 관한 증언을 남겼다. 1991년 77세로 사망했다.
[주소] 오키나와현(沖蠅縣) 토카시키지마(渡嘉敷島) 도카시키촌(渡嘉敷村)

-청구의 탑(靑丘之塔)
가가쓰고지(嘉數高地) 전적지에는 전투에서 희생된 한국인을 추도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의 정면 중앙에 ‘靑丘之塔’, 정면 오른쪽에는 ‘한민족출신충승전전몰자위령(韓民族出身沖蠅戰戰歿者慰靈)’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 아래에 있는 비문에는 한국인 출신 군인·군속 386명이 묻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엔 30명의 여성이 합사(合祀)되었다고 하는데, 한국인 ‘위안부’로 추정된다.
오키나와 수비군(제32군)은 ‘본토결전(本土決戰)’의 시간을 벌기위한 희생양이 되고자, 1944년 말부터 소년·소녀까지 포함하는 모든 주민들을 일본군 작전·진지 구축에 동원, 전투에 총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이 고지 부근의 수많은 위안부들도 부대를 따라 전장을 누비게 되었다. 수비군은 후퇴하면서도 ‘가마’라는 종유동 등지에서 미군에 저항하였는데, 군인 우선의 원칙에 따라 위안부 등 비정규군은 그곳에서 방출되거나 동굴 입구의 위험한 곳으로 밀려나 희생이 커졌다고 한다. 매년 6월에 이들을 위한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다.
[주소] 오키나와현(沖蠅縣) 가노완시(宜野灣市) 가가쓰고지(嘉數高地)

 

-헤와노이시지(平和の礎)
오키나와 전쟁 종결 50년을 기념하여, 1955년 오키나와의 ‘평화의 마음’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여기엔 국적, 군인, 민간인을 불문하고, 오키나와 전쟁에서 사망한 20만여명의 이름이 망라되어 있다. 오키나와현 사람들의 경우에는 오키나와 전쟁뿐 만 아니라 만주사변 이래의 모든 전몰자(戰歿者)도 포함돼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본토에서의 결전을 위해 시간을 벌기위한 ‘버리는 돌(死石)’이란 것이 오키나와에는 130개소나 되는 위안소가 설치되었었고 한국인 희생자들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새겨진 한국인 이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한국인은 1만여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엔 한국 국적 54명, 북한 국적 8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한국 유족 중에는 가해책임이 불명확한 채로 침략과 관련한 전적(戰跡)에 세워진 ‘헤와노이시지’에 전사자 이름을 새겨 넣는 일을 바라지 않은 사람도 다수였고 더구나 여성의 경우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음을 밝히게 되는 굴욕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소] 900-8570 오키나와현(沖縄県) 나하시(那覇市) 이즈미자키(泉崎) 1-2-2
☏098-866-2500, FAX ☏098-866-2589 e-mail:aa001309@pref.okinawa.lg.jp

 

- 평화기념공원의 한국인 위령탑
오키나와 현립 평화기념관 근처에도 한국인위령탑이 서 있다. 1975년 8월 ‘한국인위령탑 건립위원회’에 의해 세워졌는데 비문에는 “이 오키나와에도 징병, 징용 등으로 동원된 1만여명이 고난을 겪고, 전사 혹은 학살되었음”을 밝히고, 이들을 추도하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 동일한 내용의 영문도 새겨져 있다. 원래 이 위령비는 평화기념공원 부지 바깥에 있었으나 공원 경계가 확장되면서 공원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주소] 오키나와현(沖蠅縣) 혼지마(本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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