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씨 '조선통치비화' 동양일보에 연재

-3.1운동 이후 영구적 식민통치 기반 마련 '주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부임때 강우규 '폭탄세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 조작

-조선인 1만여명 무참히 학살... 곳곳서 악랄한 죄악

미즈노 랜타로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4.13 임시정부 수립일을 열흘 앞두고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문화통치’라는 미명아래 더욱 악랄한 식민통치체제를 구축한 일본인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아닌 ‘미즈노 랜타로(水野 鍊太郞·1868~1949)’라는 사실이 밝혀져 일본 식민 통치 정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충호

이같은 사실은 이충호(65·전 옥천상고 교장) 일본 구마모토국제대 부이사장이 편역한 ‘조선통치비화’에서 밝혀졌다. ‘조선통치비화’는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랜타로와 그의 추종세력들이 조선 통치에 관한 내용을 대담형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이 비화에는 3.1운동이후 3년여동안 ‘신정(新政·문화통치)’이라는 명분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산업 등 사회전반에 걸쳐 행해진 식민통치 내용이 담겨 있다.

3.1운동이후 조선 식민지 정책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하라다카시(原敬)수상은 조선 통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적임자로 미즈노 랜타로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임명했다. 당시 미즈노 랜타로는 1918년 데라우치 정권에서 내무대신을 하다가 3.1운동이후엔 재야에 있었다. 1909년 10월26일 만주를 가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사에게 저격당한 후 일본의 많은 유명 인사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대일본제국을 위해 충성하는 길을 택했다. 미즈노 랜타로도 그중 하나였다.

하라다카시 수상으로부터 인사권과 재정권을 거머쥐고 1919년 9월2일 조선에 도착한 미즈노랜타로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함께 남대문역에서 ‘부임선물’로 강우규 의사의 도시락 폭탄세례를 받았다.

미즈노 랜타로는 이를 구실로 치안강화는 물론 3년에 걸쳐 조선개혁에 나섰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산업 등 사회 전반에서 일제 통치에 필요한 개혁을 강행했고 그의 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성공적인 3.1운동에도 불구하고 1945년까지 일제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미즈노 랜타로의 악행은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최고조에 달했다.

3년간의 조선개혁 정책을 정착시킨 후 귀국, 다시 내무대신이 된 미즈노 랜타로는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민심 수습책으로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등의 소문을 냈고 이로 인해 7000~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식민 통치의 기초를 마련했다면 미즈노 랜타로는 3.1운동 이후 영구적 식민통치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토히로부미

 그러나 그의 악행에 비해 대중에게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일본의 역사 왜곡이 심화되고 있는 현재 그를 재조명해 일제의 식민통치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충호 부이사장은 “미즈노 랜타로의 정책이 아니었다면 일제가 1945년까지 조선통치를 못했을지도 모른다”며 “아직도 그의 죄악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 역사는 조선식민지 통치의 계기를 만든 이토 히로부미는 치욕의 적으로 간주하지만 영구적 식민통치의 기반을 구축한 미즈노 랜타로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1세기가 지난 지금에서야 그에 대한 재조명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는 3.1운동 이후 3년간 조선통치의 성공사례를 모아 ‘조선행정’을 편찬했는데 이 부이사장이 직접 번역, ‘조선통치비화’로 엮어냈다. 이 부이사장은 오는 17일(월)부터 월 2회 동양일보에 간교하고 악랄하게 조선통치의 재기를 만든 장본인, 미즈노 랜타로의 악행 등을 담은 조선통치비화를 시리즈로 연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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