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순 <시인>

“셋째야 얼른 일어나거라. 별자리가 많이 기울었다”
변변한 시계도 없던 시절 엄마는 캄캄한 새벽에 어린 딸을 깨우셨다.
앞산도 뒷산도 캄캄한데… 공동묘지가 있는 고개를 넘어야 학교를 가는데….
난 마루 끝에 앉아 도리질만 해댔다. 안 간다고, 무서워서 못 간다고 했더니만 이름표가 선명한 까만 운동화와 엄마가 며칠을 걸려 만든 원피스를 마루 끝에 내놓으시고 잠도 덜 깬 딸에게 국 말아 밥 한 술 먹이셨다.
“걱정마라, 애미가 학교꺼정 데려다 줄꺼구만. 암 언니 오빠들 제치고 일등한 딸인디 내 서울까지래도 델다 줄껴….”
초등학교 2학년 때다. 가을 소풍을 다녀 온 후 전교 글짓기대회에서 ‘소풍’이라는 제목으로 장원을 했다. 글짓기가 뭔지도 모르고 원고지 일곱 장을 꽉 채워 낸 것이 언니 오빠들을 제치고 1등을 한 것이다.
시골이지만 한 집에 보통 세 명은 학교를 다녀서 전교생이 8백 명도 넘었다. 엄마는 신이 나셨다. 어릴 때부터 조짐을 알아봤다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한글도 다 떼고 빈 종이만 보면 무조건 글을 쓴다고 딸 자랑을 하셨다.
아직도 캄캄한 고개를 넘어 상여집 앞을 지날 때는 너무나 무서워 벌벌 떠는 나를 품에 안고 가고 찬 개울물도 조심조심 업고 건너 주던 엄마 등에서 나던 땀 냄새와 힘들어 하던 거친 숨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어슴푸레 밝아오던 운동장에서 실컷 그네도 타고 미끄럼도 타며 놀 때 선생님과 아이들 소리에 엄마는 재빨리 나무 뒤로 숨으셨다. 어서 가라고 손만 내저으셨다. 당신의 남루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 때부터 초등학교 내내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 상도 여러 번 탔는데 그땐 공책이나 크레파스 아니면 앨범이 상장과 함께 주어졌고 어떤 큰 대회에서는 반상기세트를 타와 엄마를 기쁘게 해드렸다.
얼마 전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를 지도해 주시던 선생님을 뵈었다. 팔십을 훨씬 넘은 노구에도 어찌나 기억력이 좋으신지 우리 동기는 물론 선후배들이 살던 동네와 부모님 성함까지도 다 기억하시면서, “자네가 소질이 있었지. 나갔다하면 상 타오고 우승기도 가져오곤 했지….”
그 땐 교통도 불편해서 선생님의 자전거에 매달려 인차리를 지나 두산에 가서 버스를 타야했고, 아니면 고은 삼거리까지 거의 삼십 리을 논둑길로 걸어 나와야 청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학창시절에도 문예반과 백일장 대회를 무수히 다녔고 큰상도 탔지만 그 땐 멋도 모르고 선생님들의 지시로 산문도 쓰고 시도 쓰고 어느 땐 시조도 써야 했다.
결혼 후 다 잊고 지냈는데 1986년 10월 19일 뒷목문학회가 주최한 1회 ‘충북여성백일장’에 돌쟁이 둘째를 데리고 참가했다. 저도 같이 쓴다고 내 원고지에 볼펜을 죽죽 그어대는 걸 말려가며 제출한 원고가 덜컥 입상이 되어 오늘날 문단생활 30년이 되었다. 큰 성과를 낳진 못했지만 내게 문학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문학은 내 삶의 구원이었고 고달픈 삶의 돌파구가 되어 새롭게 인생을 엮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 길에서 만난 여러 선생님들과 선후배들이 흔들리는 돛를 잡아주는 키가 되어 무난하게 글쓰기를 하게 된 것이리라.
딸이 대회에 나갈 때마다 나 보다 더 설레셨던 엄마, 글짓기 지도를 열심히 해 주셨던 최구현 선생님, 문학회동인들, 그 분들 때문에 행복한 내 인생의 글쓰기는 계속될 것이다.
<매주 월·수·금 게재>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