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식민조선의 실제 권력자
회유책 써가며 통치체제 재구축

한복입고 갓을 쓴 미즈노 랜타로(왼쪽)과 정복을 입고 있는 미즈노 랜타로>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속보=일제강점기 영구적 식민통치 기반을 구축한 ‘미즈노 랜타로(水野 鍊太郞·1868~1949)’가 당시 한복에 갓을 쓰고 한국어로 연설하며 조선인들을 기만하는 회유책을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일자 1면

3일 ‘조선통치비화’를 편역한 이충호(65) 일본 구마모토 국제대 부이사장에 따르면 미즈노 랜타로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즐겨했던 바둑, 당구, 마작 등을 모두 끊고 오직 한국어를 배우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고 한다. 이후 한복을 입고 갓을 쓴채 각종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한국어 연설을 해 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시도했다.

또 당시 일제의 비인격적인 정책들을 지적하고 외신에 타전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회유하기 위한 연회도 자주 열어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회유책은 겉으로는 소위 ‘문화통치’를 펼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는 조선 사회전반에 걸쳐 일본 사람들이 장악할 수 있도록 세밀한 식민통치체제를 구축했다.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강우규 의사의 폭탄세례를 받은 미즈노 랜타로는 이를 구실로 치안강화에 나섰는데 3000여명에 달하는 경찰을 일시에 뽑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3000명에 달하는 인원을 한꺼번에 확보하기 힘들었던 미즈노 랜타로는 이발사와 노무자 등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까지 충당했으며 조선 각지로 보내진 이들은 각 지역에서 ‘왕’으로 군림하며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뤘다. 이로 인해 ‘그 악명 높은 일본 순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이 부이사장은 설명했다.

이외에도 3년에 걸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산업, 사회복지 전반을 개혁했고 이때 만들어진 통치기반으로 일제는 1945년 패망할때까지 조선식민통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미즈노 랜타로는 일본 도쿄제국대학 영법과를 졸업한 뒤 내무성에 들어가 참사관, 내무대신 비서관을 거쳐 각종 요직을 역임한 뒤 1918년 데라우치 내각의 내무대신에 이어 1919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임명된 인물로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코 마코토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리더십이 강하고 머리가 비상했던 미즈노 랜타로는 주로 회유책을 활용하며 3.1운동 이후 무너진 조선식민통치체제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하라다카시(原敬) 수상으로부터 받은 인사권으로 조선총독부를 자신의 추종자들과 필요한 사람들로 채웠고 이로 인해 보다 쉽고 성공적인 개혁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이 부이사장은 “미즈노 랜타로는 일본에 관료주의를 정착시킨 인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관료주의를 잘 활용했던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악행은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최고조에 달했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를 비롯해 시즈오카(靜罔)·야마나시(山梨) 지방에서 일어난 것으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만 해도 총 40만명에 달하는 대재앙이었다.

일본에서 조선인들을 몰아내고 싶어 했던 당시 내무대신 미즈노 랜타로는 극심한 사회혼란과 자국민 불안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느니 등의 소문을 내 조선인 대학살정책으로 돌렸다. 이로 인해 7000~1만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조선인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이 부이사장은 “영구적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미즈노 랜타로의 악행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역사연구가 식민사관에 의해 진행됐기 때문”이라며 “지금이라도 그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조사해 당시 조선에 있었던 일들을 명확히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