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시인)

4월은 혁명의 달이자 부활의 달이다.  4월의 초입에 청명(淸明)과 한식(寒食)이 일찌감치 터를 잡고 마른가지에서 꽃이 피고 온 대지가 생명의 기운으로 들썩이는 시기다.
올 4월을 맞는 감회가 예년과는 좀 다르다. 부지불식간에 57년 전 ‘4월 혁명’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1960년 4.19혁명은 3.15부정선거와 사사오입개헌 등 자유당정권의 독재와 부패, 무능을 보다 못한 민심이 정부에 등을 돌리면서 들불처럼 일어난 민주혁명이다.
결국 그 해 4월 26일 11시 6분, 이승만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고 하야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신동엽 시인은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1960년 4월/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영원의 얼굴을 보았다.’고 혁명을 묘사했다.
혁명이란 ‘종래의 관습이나 제도 등을 단번에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본 것이 과연 하늘이었을까.
57년 후, 2017년 3월 10일 21분, 헌재는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로 촛불과 태극기로 얼룩진 탄핵정국을 마감하고 ’장미대선‘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태블릿PC하나로 촉발된 ‘최순실 게이트’가 대통령탄핵과 구속수사를 불러왔고, 3년 만에 인양된 ‘세월 호’ 진상조사까지 대한민국 호는 격랑(激浪)의 시간을 항해 중이다.

부활의 의미는 두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하나는 ‘죽었던 것이 새롭게 다시 살아난다.’는 갱생의 의미요, 다른 하나는 ‘쇠퇴하거나 폐지한 것이 다시 성하게 됨’을 뜻하는 반복의 의미다. 부활이 어떤 모습으로 와야 할지는 분명하다.
특히 이번 ‘장미대선’에 나서는 주자들은 ‘혁명(혁신)과 부활’의 의미를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대통령탄핵과 구속수사라는 씻지 못할 상처의 대가로 얻은 기회다. 부끄러운 역사의 민낯을 가감 없이 마주 바라볼 용기가 없으면 자진해서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4.19혁명이 ‘미완의 혁명’이란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은 피로서 얻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5.16군사쿠데타로 이어지게 만들어 본래의 의미가 손상됐기 때문이다.
이번 조기대선을 진보와 보수의 패 가름으로, 또 다른 패권의 이름으로, 헛소문 유포와 독한 막말로, 또 다시 이 나라를 먹구름 속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
작가 박태순은 1968년 ‘무너진 극장’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힘들여 끌어올렸던 그 무질서의 위대한 형식이 역사 속에 미아처럼 다만 한 순간의 고립에 불과하고 말았음을 깨달았을 때는 어느덧 저 기성의 제복을 걸쳐 입고 있음을 보았다.”며 어렵게 얻은 혁명의 순수한 가치가 도로 ‘기성의 제복’처럼 낡은 과거로 회귀했음을 안타까워했다. 
1960년 ‘4월 혁명’의 거리를 온몸으로 누볐던 박봉우 시인도 ‘사월의 피바람도 지나간/수난의 도심은/아무렇지도 않는/표정을 짓고 있구나//어린 사월의 피바람에/모두들 위대한/훈장을 달구/혁명을 모독하누나//....나의 병든 데모는 이렇게도/ 슬프구나’하며 혁명의 가치를 지켜내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반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번 대선 주자들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5자구도가 됐든, 양강(兩强)구도가 됐든, 정권을 잡기위해 이전투구하기에 앞서,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국민 대통합’이라는 미답(未踏)의 장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말에 ‘겯다’라는 말이 있다. ‘겯다’는 ‘(사람이 팔이나 다리를)풀어지지 않도록 서로 어긋매끼게 걸치거나 끼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57년 전,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자유와 민주를 위해 어깨를 ‘겯고’ 4월의 거리로 나섰듯이, 이번 대선이야말로 촛불과 태극기가 ‘씨와 날’이 되어 상처 입은 대한민국을 위무(慰撫)하며 촘촘히 ‘결어’ 낼 수 있는 슬기가 필요하다.
호흡을 가다듬고 “할 수 있다”를 되뇌어 보자. 대한민국을 재건하는 ‘혁신’의 4월을 맞자. 새살이 돋아나는 부활의 4월을 ‘겯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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