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 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여자는 어린이 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와 유모차에 태우고, 할인행사를 하는 카페에서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공원벤치에 앉았다. 그런데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양복 입은 동년배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맘충 팔자가 상팔자야......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하려고...”
여자는 충격으로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쏟으면서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밤 12시가 넘어 퇴근한 남편에게 울먹이며 말한다.
“그 커피 1500원이었어.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여자는 아프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된다. 여자가 ‘빙의’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주변의 여자였다.
아픈 여자의 이름은 김지영.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이다.
소설속의 주인공 82년생 김지영 씨는 우리 주변의 30대에서 가장 흔한 여성의 모습이다. 실제 1982년에 태어난 여성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이 김지영이라 했다.
김지영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두 살 터울의 언니와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말단 공무원인 아버지와 외삼촌들의 공부로 학업을 포기한 어머니, 할머니 등 6명의 식구가 좁은 집에서 살았다. 최초의 차별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 것은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이 먹던 분유가 먹고 싶어 몰래 먹다가 할머니의 경멸에 찬 눈빛을 봤을 때로 기억한다. 남동생을 제외한 언니와 자신은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차별을 느끼며 자랐다.
김지영 씨는 평범한 초중등학교를 거쳐 대학 인문학부를 나와 홍보대행사에 취직하지만, 가까스로 합격한 회사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여자는 김은실 팀장 밖에 없다는 사실과 김 팀장이 많은 것을 포기한 대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열심히 일하고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도 회사에서는 자신을 ‘오래 남지 않을’ 사람으로 본다는 사실도 느낀다.
한번은 중견기업의 홍보부와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상대편 부장이 김지영 씨를 술자리 옆에 두려하며 야한 농담과 술을 강권해 굴욕감을 준다. 하지만 그러던 그가 도서관에서 늦게 공부를 마치는 딸을 걱정하며 데리러 나가자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 나처럼 될지도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이라며 분노를 느낀다.
공정하지 않은 회사의 인사와 입사부터 남자 동기들의 연봉이 쭉 높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김지영 씨는 직장생활에서 미로를 느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자연스레 직장을 그만뒀다.
소설은 가시적인 성차별이 줄어든 이 시대에 보이지 않는 뿌리 깊은 성차별이 어떻게 한국 여성들의 삶을 제약하고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을 서른넷 주부로 살아가는 김지영 씨의 삶을 통해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써 내려간 탓에 읽는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
김지영 씨가 왜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 가는지, 좌절과 낙담의 굴레 속에서 왜 자꾸 누군가로 빙의하는지,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적인 차별과 불평등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제약하고 억압하는지, 김지영 씨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우리 사회의 부당함을 절절히 느끼게 한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꿈꿔왔던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으면서 타자가 아닌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사회구성원으로서, 일상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길 희망한다. 그러나 사회의 벽은 82년생 김지영 씨를 비롯, 수많은 김지영들을 포기와 좌절로 밀어놓는다. 
그런데 요즘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이 책이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참 다행이다.
모쪼록 많은 남성들의 이해로 한국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차별적 현실이 해소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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