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요즘 베스트셀러 『무도 한국사 특강』의 작가인 설민석 강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선포한 태화관을 ‘룸살롱’으로, 손병희 선생의 부인 주옥경을 ‘술집 마담’으로 표현해 유족회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학자 E.H 카는 역사는 현재에 와서 재해석된다고 하였다. 설민석의 경우 재해석의 과정에서 과도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는 과잉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였다.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삼일 독립선언서는 당초 파고다 공원에서 선포하기로 하였으나 참석자가 늘어나자 갑자기 이를 포기하고 손병희와 사귀고 있는 술집마담 주옥경이 있는 태화관으로 가서 낮술판을 벌이며 낭독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체포되었고 정작 독립선언서는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에 의하여 선포된 것이며 이후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변절하였다.’라고 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 33 인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1919년 3얼 1일 태화관에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 불교 대표 한용운, 기독교 대표 오화영  등을 비롯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29명이 참석하였다. 육당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대한독립만세 3창이 이어졌다. 손병희는 태화관 주인 안순환을 불러 총감부에 전화를 걸게 하였다. 인력거가 도착하자 자동차를 부르라고 요구하여 7대의 「택시」로  29명이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순화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중종은 공주를 위해 궁을 지었으니 이것이  순화궁이다.  이 궁은 국권의 상실과 더불어 일제에게 빼앗겨 버렸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분노한 군중은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일제는 이완용에게 순화궁(당시 태화정)을 무상으로 준다. 1912년이 되자 명월관 주인인 안순환은 이 건물을 빌려 명월관의 분점으로 개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태화관이다. 안순환은 고종황제의 수라상을 책임지던 사람이었다. 그는 광화문 세종로 터에 기생의 춤과 노래를 들을 수 있고 정치와 문학을 논하며 왕의 음식을 왕처럼 대접받으며 먹을 수 있는 대중적 식당을 명월관을 만들게 되었다. 1909년 관기제도(官妓制度)가 폐지된 터라 남아도는 궁중 기녀들을 영업에 투입하여 번창하였고 주로 일본인, 조선의 고관대작, 문인과 언론인들이 출입하던 고급 요릿집이었다. 이곳을 최남선, 김기진, 백석, 이광수 등이 드나들기도 하였다. 요리와 공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때로 종교행사를 하던 호텔식 식당이지 퇴폐적인 영업을 하는 룸살롱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갑자기 독립선언문이 선포된 것이다. 태화관은 곧 폐업 당하고 이완용은 미국선교사에 이 집을 매각해 버린다.
주옥경(1894~1982)은 의암 손병희 셋째 부인으로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여성운동가이다. 그는 평양 근처 숙천에서 8살에 평양 기생학교에 들어갔다. 주산월이 그의 기명이었다. 그는 몸을 파는 기녀가 아닌 일패(一牌) 등급의 예단(藝壇)이었으니 요즘의 연예인 신분이다. 서도와 그림에 있어 재능이 뛰어나 ‘서화의 천재’라고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는 19세에 태화관에 들어와 기둥서방이 없는 이른바 ‘무부기(無夫妓)조합’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손병희를 만나자마자 천도교 신도가 되었고 1913년 22세에 결혼하였다. 그의 얼굴이 1914년 4월 8일 손병희 선생의 53세 생일기념 가족사진에 촬영되어 있고 1915년 천도교인 명부에 등재되어있다. 1919년 3월 1일에는 이미 기녀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줄곧 수절하며 수의당을 지켰다. 수의당(守義堂)은 바로 ‘의암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그는 청빈하게 살면서 천도교 내수단(內修團)을 꾸리며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의 길을 터놓았다.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파고다 공원 대신 태화관을 택하였던 손병희는 1년 10 개월의 옥고 끝에 병을 얻어 1922년 5월 19일 주옥경의 품속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 주옥경의 나이 28세였다. 누가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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