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환 <시인·명지대 명예교수>

김석환 시인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실 청주의 ‘오산부인과의원’ 오경근 원장님께 먼저 사죄와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겠다.

벌써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분의 따스하던 손길이 가슴 깊이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의 빚이 너무 무거워 용기도 염치도 없어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뵙지 못했다고 변명을 해야겠다. 나는 청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초등교사 발령을 기다리던 중 청주에 본사를 둔 월간 잡지사의 기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사장님의 소개로 ‘오산부인과의원’ 원장님 댁에 머물며 중학교 3학년인 그분 아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을 다니던 2년 내내 학교 뒤편에 있는 한 농가 쪽방에서 자취를 하며 춥고 배고프게 지내다가 뜻밖에 행운을 얻은 것이다.

특히 병원 맨 위층 특실에 들어가서 보내던 첫 밤을 잊지 못한다. 얼마나 잠자리가 포근했는지 눕자마자 단잠에 빠지고 말았나 보다. 잠결에 ‘벌써 잠이 들었나’라는 원장님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리더니 내 방으로 들어오셔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내가 깔고 자는 요 밑으로 깊이 손을 넣어보셨다. 나는 너무 갑작스런 상황이라 미처 일어나지도 못한 채 비몽사몽 그냥 누워 있었다, 원장님은 이불을 더 당겨 덮어 주시고는 편히 자라시며 문을 닫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웠다. 낮에는 외래환자를 주로 진료하시고 밤이 되면 출산하는 산모들이 많아 늦게까지 돌보시고 새 식구가 된 내 잠자리를 살피러 오시다니…. 난 그분의 섬세한 손길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져 한참이나 뒤치락거리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 손길은 청력이 무척 약하던 당신의 아들을 열심히 가르쳐 주라는 말씀보다 더 큰 채찍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낮에는 잡지사에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아이를 열심히 가르치며 지냈다.

그런데 서너 달 후에 나는 까닭도 없이 속이 쓰려 식사를 할 수도 없고 피곤하여 출근해서 책상에 앉으면 아침부터 졸음이 쏟아졌다. 그러는 나를 며칠 지켜보던 선배 기자에게 이끌려 근처 내과병원으로 갔다. 원장님은 내가 급성 A형 간염에 걸려서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선배 기자는 나를 안쓰럽게 지켜보다가 내가 오산부인과에서 기거하고 있으니 처방전을 가져가서 치료하면 안 되겠느냐고 내과 원장님께 물었다. 그 원장님은 처방전을 써 주시고 오경근 원장님께 전화로 병세를 알려 주셨다.

그길로 돌아와 매일 링거와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오전에 잡지사에 나가 잠시 일을 보고 쓸거리를 갖고 집에 돌아와 원고를 쓰고 아이를 가르쳤다. 그렇게 두어 달 지나자 건강은 매우 호전 되어 갔으나 처방해 주는 약을 계속 먹어야 했다. 원장님은 매일 나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치료를 해 주시면서도 치료비도 못 드리는 내게 오히려 매달 두둑한 월급봉투를 주셨다.

아이가 고교에 진학하고 나 역시 인천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 원장님 슬하를 떠나게 되었다.

이듬해 대전으로 내려와 문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 보고자 한남대학교 야간학부 국어교육과에 편입하였는데 동시에 기다리던 초등 교사 발령이 나서 주경야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해 11월에 아직 젊으시던 어머니께서 전염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그 충격으로 앓아 누우셨다.

난 졸지에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등록금 마감 기일 전날까지 납부를 못하고 있었다. 어렵사리 얻은 문학공부를 중단하자니 너무 아쉬워 여러 궁리를 해보다가 문득 오경근 원장님이 떠올라 부탁이라도 드려보겠다고 찾아뵈었다.

난 급한 사정을 말씀 드리며 등록금을 빌려 주시면 6개월 후에 꼭 갚겠다고 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선뜻 돈을 주셨다. 그러나 기울어버린 가세를 책임지며 학업을 이어가야 하던 나는 그 약속을 2년 후에나 지켜야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아내에게 부탁하여 사죄의 글과 함께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너무 죄스러워 찾아뵐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 여러 해가 지나 병원을 찾아 갔으나 상가로 바뀌어 있었고 돌아가셨다는 소식만 듣고 돌아서 왔다. 돌이켜보면 내가 교수직까지 오르는 데엔 원장님의 사랑과 가르침이 바탕이 되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삶으로 일러 주시고 하늘나라로 떠나신 원장님께 뒤늦게나마 용서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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