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치비화 소개 및 배경

이충호 구마모토 국제대 부이사장

동양일보는 이충호 일본 구마모토 국제대 부이사장의 시리즈 ‘조선통치비화’를 매월 1·3주 월요일 특집면에 게재한다. 1937년 발간된 ‘조선통치비화’는 일제가 조선에서의 식민통치 성공사례를 모아 엮은 것으로 이 부이사장에 의해 편역 됐다. 동양일보는 당시 일제가 자행했던 만행을 소상히 알림으로써 독자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에 도움을 주고자 그 내용을 지면에 게재한다. <편집자>

-내용 간략 소개

일제는 1919년 3.1운동이후 일제가 조선통치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고 당시 하라다케시 수상은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부총독격으로 부임한 미즈노 랜타로 정무총감이 중심이 돼 일제는 3년간 조선에서 ‘성공적인’ 식민통치 체제를 정착시켰고 그 사례를 정리했다. 일제는 당시 담당 국장들의 이야기를 좌담식으로 정리했는데 이 내용을 조선총독부 편집국에서 15년이 지난 1937년에 ‘조선통치 비화’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은 당시 2차 조선통치기에 해당되는 이른바 ‘문화통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가를 분야별로 소상히 정리해 둔 귀중한 자료이다.

필자가 일본 도쿄 간다(神田)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1988년) 구입한 뒤 번역 및 편역해 둔 내용을 동양일보에 게재하고자 한다.

 

조선통치비화(朝鮮統治秘話) 표지 (원본 昭和12년 9월24일 조선행정편집국 발행)

● 서론

대정 8년(1919) 3월 조선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 조선전역에 걸쳐 불온한 기운이 횡행했다. 하라타카시 수상은 이 사태에 즈음하여 조선통치를 일대 개혁하기 위해 동년 8월 조선총독부 관제를 개정하고, 총독과 정무총감의 경질을 단행했다. 이 때 사이토(齋藤實) 해군대장이 총독으로, 나(미즈노 랜타로)는 정무총감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 서정일신(庶政一新)을 이루고, 인사의 경질은 물론 제반제도의 개혁을 이루겠다는 것이 당시 하라다케시 수상의 방침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나는 사이토총독과 함께 조선에 부임하여, 중앙과 지방의 인사이동과 제반제도의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은 대강 신문지상 등에도 게재되었지만, 상세한 내용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들이 조선을 떠난 후 이 때의 정치 내용에 대해 상세한 답변을 해 줄 수 없겠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은 일이 있었다.

우연히 동양협회의 동인(同人)은 그 당시 관계자들의 회합을 요청하여 좌담회를 열었고, 그 때의 상황을 듣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행히 당시의 관계자들이 동경에 살고 있었으므로 수명이 모여서 이를 추억담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19년의 만세소동과 조선의 서정개혁은 조선통치사상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이에 대한 추억담은 당시의 정세를 아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유감스런 것은 그 때의 좌담회에 사이토총독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좌담회에 꼭 사이토 자작에게 출석을 부탁해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당시 자작이 매우 바쁘셔서 출석하실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제에 소위 2.26사건(1936년)으로 인하여 유감스럽게도 몽거(夢去)하시어 결국 자작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 유감스런 일이다.

조선 행정 편집국이 해당 담화의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하는데, 그 제목을 ‘조선통치비화’라고 했고, 본인이 그 유래를 기록함으로써 서문에 이를 가름하는 바이다.

1937년 9월

미즈노랜타로(水野鍊太郞)

 

● 관제개혁의 조서(詔書)

짐이 일찍이 조선의 강녕(康寧)을 염원하여 그 민중을 애무하고, 일시동인(一視同仁)에 입각하여 같은 신민으로서 추호의 차이를 두지 않고, 각기 바라는 바를 얻도록 하며 그 삶이 평안하고, 휴명(休明)의 윤택함을 향유케 하고자 한다.

오늘날 세계정세의 흐름에 따라 총독부관제개혁의 필요를 인식하고, 이를 시행함에 있어서 종래의 정치방략에 기초하여 때에 맞추어 이를 선포 제정하노라.

지금 대외적으로는 구주전쟁(제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세태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으나 짐은 이를 거울삼아 민력(民力)을 키우고 복리를 증진시키는데 진력코자 한다. 짐은 또 백관유사(百官有司)들의 뜻을 능히 체득하여 덕화(德化)를 선포하고, 민중으로서 맡은바 각각 직무에 힘써 그 업을 즐기고 영구히 승평(昇平)의 혜택을 입어 함께 방가(邦家)의 융운(隆運)을 부익(扶翊)시킬 것을 간절히 바라노라.

1919년 8월 19일.

1921년 4월(대정10) 제3부장회의 석상 미즈노랜타로의 시(賦)

● 시정방침에 관한 유고(諭告)

불초소생이 조선통치의 임무를 맡아 조선총독부의 관제개정을 함에 있어 한 마디로 민중에게 고하고자 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밝히노라.

조선통치 방침은 일시동인의 대의를 받들어 민중의 복리를 증진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는데 있다는 것은 일찍이 정한 바로서 누대에 걸쳐 통치의 임무를 맡은 자가 능히 이 뜻을 체득하여 그 땅의 개발에 힘쓰고, 국민 또한 열심히 맡은 바 업을 수행함으로써 오늘의 발달을 이루었다는 것은 중외(中外)가 한결 같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모든 정책 및 제도는 모름지기 민도의 변화나 시세에 맞추어 이를 적절히 고쳐나감으로써 인심의 호응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 불변의 진리라 할 것이다.

지금은 시운(時運)의 추이(推移)나 문물의 진보가 옛날에 비할 바 아니고, 거기에다가 구주전란이 종식되어 세태인심의 변천 또한 눈에 띄게 달라졌다. 따라서 정부는 관제를 개혁함으로써 총독임용의 범위를 확대하고, 경찰제도를 개정하여 시대의 진운(進運)에 순응하고 시정의 간단·민첩성을 통해 치화(治化)의 보급을 도모하고자 한다.

불초소생이 또한 대명(大命)을 받들어 임무를 맡게 됨에 있어 오직 높으신 뜻을 받들어 병합의 정신을 발양시킬 수 있는 길은 자나깨나 부하들을 독려하여 더욱더 공명정대한 정치를 펴도록 할 것이며,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대중의 편익과 민의의 창달을 꾀하는 일 일 것이다.

또한 조선인의 임용 및 대우 등에 대해서도 재고하여 각각 하고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것도, 조선의 문화 및 구습 중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이를 채택하여 통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제반 행정을 쇄신함으로써 장래 적당한 기회가 오면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국민생활의 안정 및 복리 증진을 꾀하도록 하겠다.

더욱더 어려운 일은 관민 상호 흉금을 터놓고 협력 일치하여 조선의 문화를 향상시키고 문명적 정치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써 성명(聖明)에 보답(奉答)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를 남용하여 불온언동을 일삼고 민심을 혼란시켜 공안(公安)을 저해하는 자 있다면, 이는 바야흐로 추호도 가차 없이 법에 의해 처리할 것이니 일반민중은 이를 양지하기 바란다.

1919년 9월 10일

조선총독 남작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정무총감이자 이른바 문화통치의 설계자였던 미즈노랜타로(水野鍊太郞).

● 좌담회 참석자

-귀족의원 법학박사 미즈노랜타로(水野鍊太郞)

-귀족원 의원 아카이케아츠시(赤池濃)

-귀족원 의원 시바다젠사브로(柴田善三郞)

-귀족원 의원 마루야마츠루키치(丸山鶴吉)

-귀족원 의원 모리야에이후(守屋榮夫)

-전 니가다현 지사 치바료(千葉了)

-전 조선총독부 식산 국장 마츠무라마츠모리(松村松盛)

-동양협회편집부 야마카다(山上昶)

 

좌담회 참석자 (맨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시바다 젠사브로(柴田善三郞), 아카이 케아츠시(赤池濃), 마루야마 츠루키치(丸山鶴吉), 치바료(千葉了), 마츠무라 마츠모리(松村松盛), 모리야 에이후(守屋榮夫).

● 좌담회 참석자 약력

(신조일본인명사전(新潮日本人名辭典) 1991.3의 자료에 근거함.)

 

-미즈노 랜타로(水野鍊太郞·1868~1949)

일본 아키다현(秋田縣) 출신. 도쿄제국대학 영법과 졸업. 내무성에 들어가 참사관. 내무대신 비서관을 거쳐 신사, 토목, 지방각국장. 철도원 이사를 역임. 동성 차관. 지방 자치제도 정비의 공로자. 저작권법의 권위자. 법학박사. 1912년 귀족원의원에 칙선되고 1918년 데라우치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입각. 다음해인 1919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郞)의 내무대신. 1924년 기요우라(淸浦) 내각의 내무대신. 1926년 정우회에 입당.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의 문부대신. 전시 중에는 흥아(興亞)동맹총재. 흥아총본부 총리가 됨. 1949년 11월 25일 사망.

 

-아카이 케아츠시(赤池濃 1879~1945)

본적 나가노(長野)현 1902년 도쿄제국대학 법과 졸업. 시가(滋賀), 아이지(愛知), 효고(兵庫) 각현 경찰부장, 내무 서기관 겸 동 감찰관, 시즈오카(靜岡)현 지사. 조선총독부 내무, 경무 각국장. 내각 척식국장. 경시총감 등을 역임하는 외에 國勢參考, 明治神宮造營 평의원 등이 됨. 1914년 구미 출장. 재임(1923.8~11945.9)

 

-시바다 젠사브로(柴田善三郞 1877~1943)

본적 시즈오카(靜岡)현 1904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졸. 동대학원 수. 1906년 문부성 소속이 되었고, 그 후 미야지(宮岐)현 내무국장. 홋카이도청(北海道廳) 척식부장. 오사카부(大阪府) 내무부장.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미에(三重), 후쿠오카(福岡), 아이지(愛知), 오사카(大阪) 각 부현의 지사, 내각 서기관장(書記官長) 등 역임. 또 선거제도 조사회 위원. 대만 척식(주) 설립 위원. 무역 심의회 위원 등이 됨. 재임(1931~1943).

 

-마루야마 츠루키치(丸山鶴吉 1883~1956)

히로시마 출생. 1909년 도쿄제국대학 법과 졸. 경시청 경시. 감찰관. 동 보안부장. 지방국 겸내무 각서기관. 도쿄(東京)시 조역(助役).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경시통감. 미야기(宮城)현 지사. 시오가마(鹽釜), 도호쿠(東北) 각 해운국장 겸 군수성 감리관(監理官), 동북지방 총감 등 이외에도 정보국 참여. 일본경마회 평의원. 중앙사회사업위원회 위원 등이 됨. 1927년 해군군비제한회의(스위스) 출석. 재일(1931~1946). 전후 공직에서 추방됨. 저서로는 ‘70년 여기저기’가 있음.

 

-모리야 에이후(守屋榮夫 1884~1973)

일본진보당 미야기(宮城) 1구 당선(중) 6회(16, 17, 18, 19, 20, 21). 미야기현 출신. 도쿄제국대학 독법과 졸. 지바(千葉), 아이지(愛知) 각현 이사관, 내무성 감찰관, 동참사관, 조선총독부 비서관 겸 조선총독부 참사관. 총독관방비서과장. 서무부장. 내무성 사회부장을 역임하고, 그 후 변호사의 업무에 종사함. 오카다(岡田) 내각의 농림정무차관, 해군 경리학교 강사. 해외 이주조합연합회, 중앙조선협회, 중앙교화단체연합회, 大東문화협회 각 이사가 됨.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중앙협회의의원. 7회 국제노동총회(제네바)에 정부 대표위원으로 출석.

 

-치바료(千葉了)

경기도 경찰부장과 총독부 부사무관 등을 거쳤으며 귀국 후 각 현(니가다)의 지사를 지냈다. ‘조선독립운동비사’라는 저서를 냈다.

 

필자 이충호 선생은…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 △성신여대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전 충북옥천상고 교장 △전 교육과학기술부 심의관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주일대한민국대사관 교육관 △주후쿠오카 대한민국총영사관 영사 △충북청명학생교육원장 △저서 ‘일제 암흑기 의사교육사’, ‘재일조선인 교육역사’, ‘신의 나라는 가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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