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 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공감능력의 부족은 애도의 인색함을 수반한다. 사람의 삶이 본디 모질고 지난한 것이라고 애써 체념해버릴 때 더더욱 그러하다. 신앙적이거나 혹은 주술적일지라도 망자를 위한 3일장과 49제는 산자의 생을 배려한 애도의 타협시한일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인간의 일상에서 애도는 유효기간이 없는 것이다. 슬픔은 가슴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무디어진 기억일 뿐이다. 애도와 슬픔의 너른 시선은 사회공동체의 가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실 공감이라는 것은 타자의 상황에 대한 내문제로의 받아들임이다. 상실로 인한 아픔은 무한하며 기한 없는 다른 슬픔으로 무기력해질 때 타인의 공감은 그래서 더 간절하다. 세월호가 그러하고 청년실업이 그러하다.

많은 부모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육체노동을 보며 ‘공부 안하면 저렇게 산다’는 식의 자녀 훈육논법을 쉽사리 택한다. 그러나 고될지언정 비천한 직업은 단언컨대 없다. 자녀교육의 기조는 고된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사회적 편견을 걷어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노동은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인간의 행위임을 가르쳐야 한다. 허드렛일이라 칭하는 직업은 가난이 만들어낸 결과지 가난을 만들어낸 동기는 결코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을 알아가는 일이 공감교육이다. 이런 사회적 풍경은 목전에 다다른 4차 산업혁명을 채비하는 우리 사회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노동의 그늘과 청년실업에 대한 사회적 담론으로 4차 산업혁명이 끈덕지게 연계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대응태세에 따라 일자리가 늘어날 수도 줄어 들 수도 있는 산업혁명의 전환기에 청년실업은 내문제가 아니라는 무감각은 방기의 사회 아니던가.

알랭드 보통은 ‘일과 기쁨과 슬픔에 관하여’에서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고 역설한다.
노동은 그런 것이다. 상실과 슬픔의 치유제이며 살아있음의 증명이다. 일하지 못하는 청년의 고통은 그래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자본주의 서늘한 현실을 비판하며 시장만능주의를 질타하고 있다. 그러나 빛나던 지성이라 평가받던 샌델은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것들’을 간과했다. 다른 인간에 대해 당당한 주체로 살려는 인간의 자유정신이 바로 노동임을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용에 목마른 청년의 노력도 노동이다. 그것은 돈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인간의 자산이다. 그러나 장기간의 실업상태에서 청년의 자산인 열정은 자아의 파괴로 이어진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노동의 소외다. 물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칼 막스의 주요 테제인 ‘소외된 노동’의 그것과는 다른 개념임을 독자들은 알아채시리라 믿는다.

공감의 척도는 공감의 행동 이후에 얼마나 자신이 양보했는지, 나아가 그 양보에 따른 궁핍을 얼마나 행복하게 감당하는지에 의해 측정될 수밖에 없다. 청년고용을 비용의 개념으로 한정짓는 기업과 나라의 고용이 온통 정규직이었던 시대의 프레임에 갇힌 노동조합도 청년과의 공감능력이 부재된 무감각한 시대의 동거자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불편하지만 보편적인 고통을 감내하길 요구받는 시대에 직면해 있다. 보편적 이윤을 남기려는 경제시스템이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적 흐름이다. 자본은 위기에 빠질 때, 고용 없는 유지를 선택한다. 예외는 없다. 그것이 경제의 성질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경제위기라는 의제 앞에 청년실업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한다. 제대로 된 일자리나누기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되어야하는 것은 대선이 목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가 각 후보들에게 주목할 일은 조세부담으로 이어질 장미 및 공약이 아니라 청년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공감의 자질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자리가 없어 방황조차도 열정적이지 않은 청년의 일상이다. 노동에서 소외된 청년의 길은 선로가 끊어져 더 이상 길이 없는 아포리아의 상태이다. 청년실업에 대한 무감각은 우리 스스로의 영혼도 마비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 사회 일자리 분배의 무감각이여, 부디 깨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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