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찾아 떠나는 ‘7080 여행’

개교한 지 햇수로 110년이 되는 연풍초가 오는 23일 총동문체육대회를 연다. 이날 체육대회는 마을 주민들이 봄 일손을 멈추고 모두 참석해 흥겨운 마을잔치로 치러질 예정이다. 사진은 지난해 체육대회.
지난해 주관기가 마련한 연풍초 출신 선배들의 회갑연. 이 아름다운 전통은 계속 이어진다.

● 마을마다 주민 나와 ‘동네 큰 잔치’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괴산 연풍초 총동문회(회장 장호상)가 개교 110년을 맞아 23일 연풍초 운동장에서 21회 총동문체육대회를 연다. 이번 체육대회를 맡은 주관기는 65회로 쉰셋 나이의 ‘꽃중년’들이다.

이날 체육대회는 연풍 고을의 큰 잔치다. 48~80회까지 졸업생과 지역 주민 등 모두 800여명이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홍문, 행정, 교촌, 괴정 등 면소재지 주민들은 물론, 북실, 배상, 진촌, 중리, 은티, 밤밭, 분지골 등 가깝게는 오리에서 멀게는 이십리길 주민들까지 바쁜 봄철 일손을 멈추고 잔치 한마당에 모여든다.

이번 체육대회의 테마는 ‘추억으로 가는 여행’이다. 40여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의 정겨운 풍경을 이 곳을 찾으면 볼 수 있다.

하굣길 허기진 배를 다스리지 못하던 촌동네 꼬마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쫀드기(맛기차콘)에 풀빵, 달고나, 라면땅, 야자, 오브라이트(테이프 과자), 아이셔, 아폴로(스틱 과자) 등 이름만 들어도 추억에 젖게 만드는 먹거리를 이곳에 가면 먹을 수 있다.

경품도 참 정겹다. 아니 촌스럽다. 촌스러워서 더욱 좋다.

주관기 65회 조성룡 동문이 염소 한 마리를 내놨고, 김규동 동문이 돼지 한 마리를 기증했다. 경품을 받은 이가 어떻게 끌고 갈지 걱정은 되지만, 그건 받은 이의 몫. 되팔든 집으로 데리고 가서 기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직접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만든 수제 숄더백은 이상호 동문이, ‘별이 다섯 개’로 알려진 장수돌침대 대표이사의 동생 최미숙 동문은 돌침대 매트를 건넸다.

십시일반 거둬 모은 선물이 자전거, 냉동고, TV, 전자렌지, 각종 잡곡 등 푸짐하다. 배구, 족구, 2인3각, 명랑운동회 등 젊은 세대부터 노년까지 선후배들이 몸을 부대끼며 한바탕 몸을 풀고 나면 개그맨 엄용수씨의 사회로 초청가수와 밴드 공연이 벌어진다.

특이한 풍경도 한 가지 있다. 개회식 직후 무대 앞에 차려지는 회갑연이 그것.

갖가지 맛난 음식으로 정갈하게 차린 회갑연의 주인공들은 동문회를 ‘졸업’하는 57회. 공교롭게도 동문회를 졸업하는 해가 회갑을 맞는 해와 겹친다. ‘뒷방’으로 밀려난다는 아쉬움을 달래주려 지난해부터 회갑연 자리를 마련해 왔다.

회갑을 맞는 57회 선배들이 자리에 앉으면 주관기인 65회 동문들이 절을 올리고 절값을 드린다.

해가 기울도록 정겨운 함성을 이어지고 여흥이 잦아진 뒤 폐회식을 마치면 추억은 강물처럼 또 흐르고 내년의 추억은 또 쌓일 것이며, 그렇게 연풍면 사람들의 하루는 저문다.

 

연풍현감이 집무를 보던 풍락헌. 정조가 연풍현감으로 제수한 단원 김홍도 또한 이곳에서 고을을 다스렸다.

● 연풍초 개교 110년·연풍향교 창건 502년

1909년 8월 31일 사립 연명보통학교 4년제로 설립인가를 받은 연풍초는 1912년 3월 16일 연풍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고 그해 4월 1일 개교했다. 학교가 문을 연 지 햇수로 110년이 된 것이다. 올 2월 16일 104회 졸업생까지 모두 6700여명의 학생을 배출한 연풍초는 1970년대 초중반만 해도 분교인 오수초와 신풍초까지 합쳐 전교생이 1500명이 넘는 대단위 학교였다. 그 시절 이농현상으로 학생 수가 줄기 시작하면서 신풍초는 폐교됐고, 2017년 현재 전교생이 고작 37명뿐이다, 학생 수는 적지만 연풍초는 나름대로 알찬 학사운영을 꾸려가고 있다.

삼성꿈나무장학재단 공모사업에 ‘이화령밴드의 연풍연가 이야기’가 4년 연속 선정됐다. 3~6학년으로 구성된 이화령밴드는 2015년과 2016년 전국학교예술교육 페스티벌에 충북 초등학교 예술동아리 대표로 참가해 수준 높은 연주실력을 선보였다.

창의미술과 이화령밴드, 사물놀이, 골프교실, 태권도 등 전교생이 모두 참가하는 방과후학교는 지난해 ‘베스트 스쿨’로 선정되기도 했다.

연풍 교육의 연원은 개교 110년을 자랑하는 연풍초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즘으로 치면 중등교육기관인 연풍향교가 창건된 것은 1515년(중종 10년)이었다. 조선시대 때 조정으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고 한다.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현재에는 봄과 가을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연풍 교육의 역사는 502년이나 되는 셈이다.

 

조선시대 포도청으로 쓰였던 연풍현청. 병인박해 때 이 포도청에서 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 산 높고 골 깊어 현감이 두 번 울던 곳

옛날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고을의 수령들은 한결같이 두 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주상의 총애를 잃어 가도가도 끝없는 산간벽지로 마치 유배를 가는 듯한 서러움에 흘리는 눈물이 첫 번째 눈물이요, 산자수명한 풍광과 순박하고 정 많은 연풍 고을 백성들의 인심에 석별의 정으로 흘리는 아쉬움의 눈물이 두 번째 눈물이었다.

그렇듯 두 번 눈물 흘렸을 현감 중에는 김홍도가 있었다.

‘환쟁이’ 김홍도를 파격적으로 현감에 제수한 정조는 김홍도를 임지로 보내면서 제2의 외금강이라 불리는 단양 근린의 절경을 화폭에 담아오라고 명했다고 한다. 단원 김홍도가 연풍 현감에 제수된 것은 1791년 12월 22일. 늙도록 자식이 없었던 김홍도는 연풍 상암사를 찾아 치성을 드린 끝에 마흔 여덟의 나이에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연록(延祿), 연풍(延豊)에서 나라의 녹(祿)을 먹을 때 태어난 아들이라는 뜻이다. 연풍 주민들은 그를 기려 ‘김홍도 거리’를 조성해 놓았다.

세월이 흘러 연풍현청인 풍락헌(豊樂軒·영조 42년 명명)은 연풍초 교무실로 사용되다가 1972년 교사(校舍) 오른편으로 이전 중수했다. 그 당시 포도청(연풍 향청)은 연풍공소로 사용된 역사적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교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소백산맥 심심유곡을 찾아 숨어든 곳이 연풍이었고, 자연히 연풍은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으로 형성됐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조령(鳥嶺·새재)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넘나들며 피신하기 쉬웠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곳 또한 그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연풍성지는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조성됐다.

교수형 형구돌. 병인박해 때 배교하지 않는 신자들을 교수했던 돌이다.

연풍 출신으로 순교한 황석두 루까(1813~1866년)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을 방문할 때 103위 성인 중 한 명으로 시성됐다.

1967년 8월 17일, 조용하기만 하던 외진 산골 연풍에 무장간첩이 출현했다. 5월 30일 전남 영광군 법승포로 침투한 무장간첩들은 7월 21일 북으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고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연풍까지 북상해 온 참이었다. 분지리에 은신해 있던 간첩들이 불을 피워 연기가 나자 주민들이 연풍지서에 신고를 했고, 경찰 3명이 출동해 교전을 벌이다 연풍 지서장이 그들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공수특전단까지 투입해 4명을 사살하고 1명은 생포했으며 1명은 9월 2일 제천 봉양지서에 자수하면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 같지만, 실제 벌어졌던 사실이다. 그만큼 연풍은 심심유곡 속에 숨겨진 고을이었다.

‘상전벽해’라고, 현재 연풍은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다. 여주 분기점에서 감곡, 충주, 괴산 장연, 연풍을 지나 경북 문경으로 이어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있다. 괴산과 연풍을 통해 경상도를 잇는 4차선과 충주와 연풍, 문경 쪽으로 이어진 4차선 국도 34호선이 있고 2021년에는 이천과 충주, 수안보, 연풍, 문경을 잇는 94.3㎞의 중부내륙선 철도가 건설된다.

 

인터뷰 / 장호상 연풍초 총동문회장

“110년 역사의 모교… 그 전통에 긍지를 가져요”

 

장호상 연풍초 총동문회장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지난 1월 21일 연풍초 13대 총동문회장에 취임한 장호상(58·사진) 원림I&D 대표이사는 회장의 역할을 ‘희생과 봉사’로 정했다.

장 회장이 꾸려가고 있는 사업체 때문에 동문회와 관련된 ‘소소한 일’들에 시간내기가 그리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지만 주위의 간곡한 권유로 막상 맡게 되면서부터 11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연풍초의 위상에 흠결이 나는 일은 하지 않아야겠다는 각오로 임했다고 한다.

“110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려면, 그리고 선배님들의 노고와 모교에 대한 긍지를 생각하면 동문으로서 해야할 마땅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는 형편이 그리 궁핍한 것은 아니어서 제가 퇴임하는 2019년 1월까지 제 생활의 씀씀이를 줄여 5000만원의 기금을 마련해 후배들에게 물려줄 생각입니다.”

장 회장이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 110년 연풍초 총동문회의 모습은 ‘기본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선후배 사이 우애를 돈독히 하고 타향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찾고 싶은 고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고향 발전과 관련된 몇 가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사실 예산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고향을 떠나 있어도 ‘수구초심’이라고 늘 고향에 대한 생각은 애잔하게 남아있죠. 제 나름대로 조금의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임했습니다. ‘멍석’을 깔아놓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습성이지만, 총동문회부터 선도하여 실천하자고 나서자 뜻있는 분들이 십시일반 참여하게 됐습니다. 모교 발전을 위한 장학금 기금 마련과 후배들의 견학과 체험학습 지원으로 견문을 넓혀주고 연풍면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고을 큰 잔치’로 동문체육대회를 이끌어 나가다보니 고향 사람 모두가 하나라는 화합의 장이 마련됐습니다.”

장 회장은 또 미래를 준비하는 동문회를 만들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 1000명이 넘던 연풍초 전교생이 30명 안팎으로 급격히 감소한 지금, 모교에 대한 걱정이 큰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그는 동문체육대회 등 그해 여러가지 모교 행사를 주도하는 주관기수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전통이 퇴보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 회장은 마지막으로 110년 전통의 모교에 대한 긍지를 말했다.

“시골 출신으로 서울서 생활하다보니 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생기더군요. 그때마다 생각했어요. ‘촌놈의 긍지’를 갖자. 그 긍지는 110년 되는 우리들의 모교, 연풍초 출신이라는 자부심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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