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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세이-열정 넘치던 젊은 날의 기억
동양에세이-열정 넘치던 젊은 날의 기억
  • 윤현자
  • 승인 2017.04.23 2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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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자 <시조시인>

연례행사로 치르는 결산작업을 마무리 하고 눈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니 목련꽃은 이미 지고 거리를 흐드러지게 물들였던 벚꽃마저 바람을 동반한 하루 밤 봄비에 여지없이 꽃잎을 떨구고 있다. 언제 꽃을 피웠었나 싶을 정도로 꽃잎을 떨군 잔가지마다 연초록 새순이 앞 다투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안팎으로 어수선하고 시린 정세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던 동토에도 이렇게 어김없이 봄은 찾아오고 있었다.

삼십년 넘게 해온 일이지만 해마다 이즈음이면 그때의 기억으로 잔뜩 긴장이 되어  결산자료를 몇 번씩 검토하게 된다. 혹시 잘못된 자료는 없는지, 혹시라도 누락된 자료는 없는지, 혹시 숫자를 잘못 입력하지는 않았는지…. 검토와 검토 끝에 합계잔액시산표를 비롯한 재무제표가 확정되면 그제야 온몸을 짓누르던 긴장을 풀게 된다.

결혼 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에 근무했던 이력으로 결혼 후에도 어렵지 않게 지역의 중견 건설회사 경리부에 취직을 했다. 요즘엔 경리업무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업무를 전산에 의해 처리하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장부를 오로지 수기로 작성하고 주판알을 튕기며 차·대변을 맞추어나갔다.

한해의 절반을 훨씬 넘긴 9월 초에 입사하여 업무파악도 되기 전에 결산을 하려니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지만, 여상을 갓 졸업한 어린 직원과 함께 삼십여 개의 현장 원가를 하나하나 마무리하고, 모든 관리비를 안분하였다. 드디어 시산표가 작성된 날, 달력을 보니 결산마감일 열흘 전이다. 4년 가까이 전업주부로 있었지만 예전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고 자신하려는 순간! 눈앞이 아득했다.

주판알을 조심스레 튕기며 마지막 계정의 값을 더했을 때 당연히 일치해야 될 합계잔액시산표의 차·대변 금액이 맞지 않았다. 결산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시산표가 일치하지 않으니 당연히 다른 재무제표는 맞지도 않을뿐더러 결산서에 엄청난 오류가 났다. 법인세 신고 마감일이 열흘뿐이 안 남았는데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좋을지 머릿속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 잉잉댔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장부며 박스마다 가득 담긴 전표 어디에서 차이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도저히 할 수 없겠다며 사장님께 이실직고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기혼여성의 채용이 일반화되지 않아 지역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흔하지 않던 시절, 어린 자식까지 둔 기혼자임에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만으로 선뜻 채용을 결정해준 사장님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나 자신에게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혼미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밤낮을 새워 전표와 장부를 대조한 끝에 마감일 사흘을 남기고 재무제표를 완성하여 그해 결산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요즘의 정서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을 일이지만 그래도 그 일을 겪은 뒤, 나름 나 자신에 대한 신뢰와 일에 대한 열정이 생겨 오늘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나약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면 다시는 그 업무를 볼 자신이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한 자리에 앉아 숫자와의 매력적인 한판 씨름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은 그때 그 일이 떠올라 아찔하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대견스러워 혼자 박수를 보낸다. <매주 월·수·금 게재>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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