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독립운동가 이상설 (1870~1917) 선생의 순국 100주년 추모제가 22일에 충북 진천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연이어 오는 8월부터 학술대회가 시작되고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지였던 한흥동에 중국 밀산시 인민정부와의 합의에 의해 기념비가 건립된다. 한흥동은 그가 한인을 이주시켜 만든 최초의 독립운동 마을이다. 이상설기념관은 진천 산척리에 2019년까지 87억 7천만 원을 들여 2만 5125㎡ 규모로 세워진다니 늦은 일이긴 하나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설 선생은 1917년 3월 2일 47세의 나이로 망명지인 연해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이동휘, 이회영 등에게 남겼다. 이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진다. 선생은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혼령마저 조국에 돌아갈 자격이 없으니 몸은 불태워 바다에 날리고 제사마저 지내지 말라고 유언한 것이다.
선생은 을사조약 후 북간도로 넘어가서 이동녕 등의 애국지사들과 더불어 독립사상 고취를 위한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만들어 활동 중 고종에 의해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 이위종의 직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등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일본은 이들에 대한 궐석재판을 진행하여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였고 고종은 강제 퇴위시켜 버렸다.
국내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이상설은 1908년 미국으로 건너가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 대표로 참석하였고 1909년 국민회 중심의 독립운동을 위해 다시 발해의 옛터인 연해주로 돌아온다.
1910년에 들어서면서 연해주의 여러 의병부대들은 대한13도의군으로 통합된다. 도총재 유인석을 비롯하여, 이범윤, 이남기, 홍범도 등이 직책을 나누어 이상설은 외교대원의 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11년부터 권업회(勸業會)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연해주 중심 도시인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는 1864년부터 정착을 시작한 조선인들이 이주 50년이 되는 1912년에 20만 인구로 추산되는 핵심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힘입어 이상설이 참여하고 있는 독립부대는 출발한 지 4년 만에 3만 명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연해주 동포사회가 무엇보다도 큰 배경이 되었으며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반일감정 또한 광복군을 양산하는데 더할 나위없는 훌륭한 토양이 되어주었다.
1914년 권업회가 수립한 ‘대한광복군정부’의 최고 수반인 정도령(正都領)에 취임하게 된다. 이 정부는 연해주와 서북간도에 3개 군구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으며 최초의 해외 임시정부 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웬 날벼락인가.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일본에게 참패한 슬픔의 기름으로 10년간이나 활활 타오르던 러시아인의 복수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제국과 동맹을 맺게 된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한국인들에게 더 이상의 정치와 사회활동을 할 수 없도록 금지하였다. 러일동맹 1개월 만에 대한광복군정부 건립을 주도했던 권업회는 강제 해산당한 것이다. 이에 대한광복군정부는 크게 타격받고 더 이상 활동을 표면화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독립운동의 상하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본부장을 맡게 된다. 후일 이동녕, 이회영, 조성환, 이시영, 이동휘 등은 이상설의 조국독립에 대한 뜻을 받들어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게 된다. 안중근 의사가 제일 존경하였던 이상설 선생은 대한민국 건립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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