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청양문화원장>

이진우 청양문화원장

어린 시절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던 장승이 생각난다. 십 오리 길을 걸어서 학교를 오가려면 아침, 저녁으로 마을앞 장승과 마주치곤 했다.

주먹 같은 코와 귀 밑까지 찢어진 입, 험상궂은 얼굴과 비바람에 썩고 패어진 주름살은 어린 나에게는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캄캄한 밤이거나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면서 장승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이해하면서 오랜 친구처럼 정겹고 믿음직한 이웃이 돼버렸다.

1960년대 이전 농촌의 고향마을을 연상해보면 마을 뒤쪽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마을을 품고 있고, 앞쪽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으며, 마을로 들어오는 어귀에는 장승이 버티고 있어 부정을 금하는 성역으로 잡귀와 질병 재앙을 막아주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 때 돌덩이 하나를 돌무덤에 올려놓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고, 마을 어르신들은 가족 건강과 자식들의 출세를 기도하기도 했다.

이런 정경은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대부분 마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마을에 따라서는 산신제, 용왕제, 고목제, 동화제 등 마을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가족의 무병장수, 공동체의 단합과 발전을 기원했다.

칠갑산으로 유명한 청양지역에는 아직도 80여개 마을에서 이 같은 마을제를 해마나 지내오고 있으며, 8개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 전후에 장승을 깎아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 중 청양군 정산면 용두리 장승제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초청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장승제 시연을 펼쳐 보이는 등 우리 고유의 전통 민속을 원형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청양지역에 이처럼 많은 민속 문화가 보존·계승되고 있는 것은 험준한 칠갑산과 전체면적의 70%가 산지로 형성돼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민속 문화 보존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양군에서는 이러한 민속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기위해 칠갑산 자락에 장승공원을 조성하고 매년 4월 장승축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올해로 19회째를 맞은 칠갑산장승문화축제는 필자가 원장으로 있는 청양문화원이 주최·주관하는 행사로 전국에서 수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로 전국적인 축제로 발돋움했다.

지난해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노표장승을 재현하는 행사를 개최해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며, 올해로 3번째 실시한 장승혼례식은 칠갑산장승과 지리산장승, 소백산장승, 그리고 올해는 함안 장승과 각각 혼례를 통해 지역 간 장승문화의 교류를 꾀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노표장승은 10리, 30리 간격으로 길가에 장승을 세워 이정표 역할을 했는데 역참제도 폐지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사라졌으며, 아쉽게도 외국 박물관 2곳에만 당시 노표장승이 남아 있을 뿐이다.

또 장승축제장에서는 청양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전통 마을장승제가 원형 그대로 시연되고 있다.

모두 6개 마을이 나와 시연을 펼치는데 어릴 적 봐왔던 장승의 모습이며 마을주민들이 정성껏 제를 지내고 떡과 음식을 관광객들과 나누는 모습은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현재 전통마을장승제를 지내는 마을은 전국적으로 몇 개 마을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 다 사라지고 없으며 각 도에서 도 지정 무형문화제로 등록된 몇 개 마을만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이처럼 장승문화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1960~70년대 급속한 현대화와 새마을 사업 등으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조각예술로 또는 상업적 홍보 수단으로 장승이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로로 치켜뜬 큰 눈, 주먹 코, 큰 입에 성글한 이빨 장승의 얼굴은 무섭고 험상궂은 모습이지만 부리부리한 큰 눈이 납작코 또는 주먹코와 성글성글한 이빨로 이어지면서 온화하고 익살스런 노인의 모습으로 비쳐지는데 이것이 장승의 실제 모습이다.

의도와 표현의 불일치를 통해 표현하려한 선조들의 철학과 해학을 장승을 통해 다시 한 번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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