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원(신성대 교수)

▲ 신기원(신성대 교수)

박근혜대통령이 국정농단사건으로 헌법재판소에 탄핵 소추되었다가 재판관 전원일치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청와대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선시대 연산군과 광해군이 떠올랐다. 자신의 국정파트너인 국회에서 탄핵 소추되고 또 다른 파트너인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어 결국 권력의 장에서 사라지는 모습은 조선시대 폭정을 휘두른 왕에 대해 정치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일으키는 反正으로 쫓겨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정치란 국민을 위한 행위여야 한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폐위된 왕은 祖와 宗으로 칭해지는 다른 왕들과 달리 왕자시절의 호칭인 君으로 불리며 무덤도 陵이라 불리지 않고 墓라고 칭해진다. 하지만 조선시대 여기에 해당하는 연산군과 광해군에 대해서는 평가가 달라야 한다. 연산군은 검증된 폭군이기에 폐위되었지만 광해군의 경우에는 대내외적인 부분에서 달리 평가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신병주는 「왕으로 산다는 것」에서 연산군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이 원하는 곳 어디에나 금표를 쳐서 백성들을 괴롭혔으며 기생들과 흥청망청 즐기고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된 충성을 요구하는가하면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형벌로 보복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을 때 백성들은 연산군을 뒤쫓아 원망하며 풍자노래를 지어 불렀다. 민심은 천심이고 정치의 근본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산군의 폭정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 후궁의 자리에서 일약 제헌왕후자리에 오른 윤씨는 이듬해 원자 연산군을 낳음으로써 기대를 모았으나 남편인 성종보다 연상이었고 성격도 강해서 그런지 성종의 행동을 투기하고 손찌검까지 하여 폐출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았다. 이후 연산군은 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의 아들로 입적되어 그녀가 생모인줄 알았으나 19세에 왕으로 즉위할 때 성종의 묘지문에 왕비의 아버지가 달리 쓰여진 것을 보고 생모가 폐위된 것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연산군일기에 ‘시기와 모짐이 그 어미와 같고 성질이 또한 지혜롭지 못했다’는 기록과 ‘왕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를 통하지 못했다. 하루는 성종이 시험삼아 庶務를 裁決시켜 보았으나 혼암하여 분간하지 못하므로 성종이 꾸짖었다’는 언급 그리고 ‘이 때문에 父王 뵙기를 꺼려 불러도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는 내용을 보면 성군의 자질이 있었다고 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에 반해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에서 안전하게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 분조를 지휘하여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을 누볐다. 또한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는 피폐된 토지의 회복과 민생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동의보감을 편찬케 하여 백성들을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밖에 냉정한 대외정세 분석과 탁월한 외교감각을 발휘하여 명과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하는 한편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을 자극하지 않아 국토가 초토화되는 상황을 방지하였다. 하지만 반대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일 및 영창대군을 비롯한 이복형제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은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나 반정이후 정치적 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공신들의 배만 불리다보니 민간에서는 시대를 한탄하는 傷時歌가 유행하였고 급기야 두 차례의 호란을 당하였다. 이런 점에서 똑같이 君이라는 칭호로 불리지만 광해군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권이 바뀌는 것은 복합적인 것이다. 민심이 다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권력욕이 강한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그 시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현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이자 부녀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기대 속에 출범했던 대통령이 파면이라는 수모를 당하고 쫓겨나 법의 심판대에 선 사실을 통해 특히 정치인들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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