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주완 <아산문화재단 상임이사>

나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를 2015년 개봉할 때 관람하였고, 며칠 전에 다시 보았다. 귀신의 뼈를 녹인다는 ‘옥추경’의 경문이 읊어지면서 영화는 격하게 시작되었다. ‘사도’에서 세자는 1762년에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필자에게는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760년 7월22일이 의미가 있다. 금위영과 어영 군사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사도세자의 온궁행렬이 힘겹게 온양(아산시의 옛 명칭)의 청댕이 고개를 오른 날이었기 때문이다. 군마 한 마리가 대열을 이탈하여 콩밭을 짓이기자, 세자는 “밭주인에게 콩 값을 배상하고 부역을 감해주라”명할 만큼 자애로웠다.

 세자의 나흘간의 지루하고 힘겨운 행렬이 고갯마루에 당도하자 취타대가 격하게 울어댔으며, 온양행궁에 당도한 세자는 그날 밤 나이든 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증기로 자욱한 탕실에 들었다.

 병약하거나 포악해 보이지 않았으며, 다음날부터 세자는 정무를 보고, 온천욕을 하고, 영괴대에서 활을 쏘며 체력을 단련했다. 한 달 보름 후에 다시 청댕이 고개를 넘어간 사도세자는 2년 후 망자가 되어 다시 청댕이 고개를 넘어와 온천욕을 즐겼으리라.

문화부 장관을 엮임 하였던 이어령은 고향집 구 온양 좌부리에 자주 들렀다. 그는 수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서 지프차의 두 뼘 남짓한 운전대의 차창 너머로 본 평범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난한 고향을 가슴 절절히 묘사하였다. 굉음을 내며 청댕이 고개를 넘은 지프차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경적소리에 놀란 늙은 부부가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경황이 없어 허둥대는 모습을 애잔하게 그려냈다. 누렇게 뜬 검버섯의 얼굴, 공포와 당혹스런 표정, 마치 닭처럼 뒤뚱거리며 쫓기던 그 뒷모습, 경황없음에도 서로 꼭 부여잡은 앙상한 노부부의 손에서 이어령은 쫓기는 자의 뒷모습에서 나라의 비루함을 보았노라고 묘사했다.

위 두 이야기는 ‘청댕이 고개’를 축으로 한다. 온천수의 효능이 알려진 뒤부터 온양행궁을 찾았던 역대 왕들에게 이 고개는 질병 치료와 휴양을 위해 넘어야 할 하나의 관문이었다. 고개의 주인이 따로 없으니 왕족이건 백성이건 통행세 없이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풍물5일장이 서는 날이면 마차와 지게꾼과 장돌뱅이가 경쟁하듯 숨 가쁘게 오르고 내리던 치열한 삶을 위한 고개였다.

 격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넘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신비롭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잡아오겠다고 고개를 넘은 소년들도 있었으리라. 마침내 그 소년들 중에는 신기루에 홀린 아이도 있었겠지만, 드디어 무지개를 잡았고 세상을 아름답게 색칠하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아스팔트가 덮이고 길이 확장되어 지금의 청댕이 고개는 자동차로 단박에 넘을 수 있다. 지금의 청댕이 고개에는 옛날의 감흥을 불러일으킬만한 흔적이 별로 없다. 고갯마루 한쪽 켠에 350년 수령의 느티나무만이 비스듬히 여유롭고 나른하게 누워있을 뿐이다. 이 느티나무는 250년 전 사도세자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이어령의 지프차에 쫓기던 늙은 노부부의 허둥대던 뒷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거하게 취기가 오른 장돌뱅이들의 푸념도 모두 들어주었을 것이고, 나무를 기어오르는 아이들 등살에 피곤도하고 간지러움도 많이 탔을 것이다.

청댕이 고개를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이천 장군이 몽고군과 일대 격전을 치러 승리한 곳이요, 고불 맹사성도 소를 타고 넘은 길이요, 다산 정약용도 넘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군도를 휘두르며, 6.25때는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넘은 고개다. 청댕이 고개에는 5천 년간 선인들의 희노애락이 담겨있다. 이 고개는 숨 가쁘게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숨을 돌릴 안식처였고, 외지로 떠나는 자식을 배웅하며 눈물을 훔치던 이별의 고개요, 고향으로 돌아오는 가족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반기는 설렘이 이는 곳이었다.

지금의 청댕이 고개는 4차선의 넒은 도로로 확장되고 깊게 파이어 자동차들이 신나게 질주한다. 다만 350년 동안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고갯마루에 늙은 느티나무만이 가만히 지켜 볼 뿐이다. 이제 ‘청댕이 고개’를 기억하고 지키는 이는 늙은 느티나무뿐이다. 지킬 것은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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