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충북학연구소장)

▲ 김규원(충북학연구소장)

19세기말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그리고 정신분석학자 G. 프로이트도 性的 욕망을 중심으로 누드화와 무의식을 통해서 自我를 표현하고 또 그 이면을 알고 자 했던 것 같다. 물론 클림트도 있었고 칼 융(jung)도 있었지만 말이다. 에곤 실레의 작품은 <헤르베르트 라이너의 초상>이나 <해지는 모습> 등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누드이고 간혹 진행 중인 섹스를 그리기도 했는데 28세에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이런 생각만으로 살았을까. 프로이트의 무의식분석처럼 性的 推動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실레의 작품들이 요즘 새롭게 조명을 받는 이유는 예술적 표현을 규제하던 정치적, 종교적인 제도나 관습이 변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달에 비엔나의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본 실레는 삶의 상대성을 넘어 무상함에 대한 감성적 집착 혹은 고민이 묻어나 보였다. 우리네 삶이 통상 신념이나 가치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문화나 문명을 울타리 쳐서 구성된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 혹은 생각은 옳거나 善하다고, 효율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도덕이나 윤리의 측면에서 신념과 가치는 절대적인 측면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도덕적 행태들의 原形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처음부터 그러한 것이 아니라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생존을 지향하면서 생겨난 하나의 우연적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일관된 성향을 보임은 곧 위험회피를 위한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화를 기피하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생겨난 방어기제가 기존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이른바 의도적 합리성(motivated reasoning)이라고 하는 태도 즉 자신이 알거나 믿는 바가 가장 객관적이며 사실에 부합하다고 믿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운동경기를 할 때는 실력과 무관하게 늘 우리 편이 승리를 해야 하며 내 가족, 우리 마을 사람이 다른 사람과 싸우면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대방이 나쁜 X 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西歐의 경우 善이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만나는 철학적 전통과 종교적 믿음의 결탁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홍명섭). 아무튼 서울의 모 구청장이 자신이 믿는바 대로, 아마도 의심 한 푼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다가 선거법 위반 등등으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내가 보거나 들은 것, 믿는 것은 확실한 것인가라는 의문은 유럽을 중세와 근세로 나누는 분기점이 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로 연결된다. 입자 물리학 등에 의하면 나의 생각과 생각의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서 대상 혹은 객체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나치의 히틀러처럼 확신에 맹목 그리고 혐오가 더해질 때 인류의 역사는 늘 지옥으로 달려갔으며 의심과 검증이 사상계를 지배할 때만이 인류는 이른바 합리성 및 최소한 次善이라는 열매를 얻은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맹자가 말하는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서 측은지심이 첨가가 된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나아지지 않을는지. 대개의 인간이 지닌 고집스러운 확신과 맹목에 사로잡혀 타인을 이끌려 한다면 이 또한 측은하지 아니하랴. 아무튼 에곤 실레의 <추기경과 수녀>에서 드러난 맨발과 시선의 불일치 같은 두려움이 이드(id)와는 다른 설명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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