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희 <충청대교수>

아내의 다급한 전화, 장모님이 간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해야 한다며 오열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한동안 멍해졌지만 한편으로 수술할 수 있다는 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람과 바로 처갓집이 있는 분당으로 향했다. 달리는 차창에 장모님과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머니를 대학교 2학년 때 잃고 10년이 지나 장모님을 처음 뵈었을 때, 장모님이 아닌 어머니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고 당연히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시절, 집사람을 만나 3년 교제를 하였는데, 방학을 맞아 한국에 나왔던 적이 있었다. 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맨하탄 음대 교수 초청음악회’를 개최하는 이유로 나왔지만, 실은 집사람을 보고 싶어서 애써 기획한 행사였다. 그런 마음으로 급하게 기획을 하였으니 예산문제도 불투명했고 모든 것이 어려웠었다.

 한국에 잠깐 나왔으니 움직일 차도 없었고 사람들 만나 차 마실 돈도 여유가 없었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나이기에 식구들에게 얘기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그 때, 장모님이 잠깐 얘기 좀 하자고 나를 불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시면서 바쁘게 왔다 갔다 하고 사람들 만나려면 돈이 필요할 거라면서, 슬며시 자동차 키와 하얀 봉투를 내게 주시는 게 아닌가. 순간 무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당시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공연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고, 그때의 장모님에 대한 고마움은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1997년 한국에 귀국 후, 공연기획사 아트코리아를 설립하여 크고 작은 공연을 치루면서 나의 캐리어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현지 적응의 어려움과 IMF 시기와 겹쳐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의 어려움으로 집도 월세로 살았고 그나마 계약만료로 그 집마저 나오게 되었을 때, 사실 아무 대책도 없었다. 그때 또 한 번의 장모님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그 전화통화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서방, 어디로 갈 계획인가? 갈 데는 있는가?” 그러신 후에 결국은 마련해주신 새 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장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죄송스런 마음을 언젠가 보답하리라 마음을 먹고 살고 있다, 그 후로도 경제적 도움을 드리기는커녕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어, 그때 당시의 고마움에 대한 보은(報恩)은 꿈도 꾸지 못해 늘 죄송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시간이 가면서 여유도 생기고 일도 자리가 잡히고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 가는 이때, 장모님의 소식은 너무도 황망했다.

장모님은 현재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돼서 항암 치료를 받고 계시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정밀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힘든 항암치료를 잘 견디어 주셨다.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12번째의 이 마지막 항암치료가 끝나면 장모님 모시고 어디라도 다녀오리라.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이를 눈치 채시고 남 몰래 보듬어 주시던 장모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그 동안 받았던 사랑을 조금이나마 되돌려 드릴 수 있는데...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용기를 일깨워 주신 그 은혜로움이 요즘의 봄볕처럼 눈부심으로 다가선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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