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내수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말끔하게 정리된 화단에 가로 3m, 세로 3m 크기의 화강암 비문이 눈에 들어온다. 청주보훈지청에서 우리 고장 현충시설로 소개된 바 있는 ‘내수초 독립운동기념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비문은 1919년 4월 2일 정오경 교사와 85명의 학생들이 의병장 한봉수 선생의 지휘로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의 의의를 기리고자 지난 2004년 본교 동문에 의해 건립된 초등학교내의 유일한 독립운동기념비이다.
1919년 2월 27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괴산의 홍명희와 내수의 한봉수는 손병희 선생의 집을 방문한다. 당시 손병희 선생은 내수 지역은 물론 충청 지역민의 가슴에 지펴지고 있는 항일불꽃의 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삼일 독립선언문이 선포된 후 손병희 선생은 투옥되었고 평양과 서울을 시발로 하여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지나갔다. 내수지역은 3월 21일 민문식을 비롯한 천도교도 10인이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뜻을 받들어 내수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민문식이 연행되자 3월 25일 세교리 주민들은 등불을 손에 들고 거리를 나섰다. 일제가 우리 땅에 드리운 어둠을 씻어내기 위해 제등행렬을 벌인 것이다. 4월 1일이 되자 저곡리와 덕암리 일대에 독립통고문이 나돌며 의병장 한봉수 선생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바둑판에 깔린 바둑알이나 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처럼 일제의 무력과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우리민족을 공포와 암흑의 세계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독립을 향한 우리민족의 등불을 꺼뜨리지는 못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청주지역 학생들의 연합시위가 1930년 일어났다. 내수보통학교에서 청주지역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이인찬, 함귀봉, 박노섭 학생이 주동하고 있었다. 학교 등사판을 몰래 빼내어 하숙방에서 모포로 불빛을 막고 전단을 수천 매 만들었다. “백의(白衣魂)을 싸고 도는 흑운을 격파하고 광명한 자유로운 길을 밟자” 결국 내수보통학교에서 싹트기 시작한 독립정신이 표출된 것이었으니 내수초등학교는 학생독립운동의 요람인 셈이다.
1931년 6월 14일 학교 오동나무에 "독립만세"라고 쓴 격문이 나붙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큰 고초를 겪게 되었다. 격문을 발견한 일제 경찰은 5학년 담임 홍봉희와 5학년 학생 윤경훈, 4학년 학생 윤성훈 등을 입건하여 취조하고 가택수색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사건을 확대시켜 평소 항일의식이 강한 인사들을 탄압할 기회로 활용하려고 애를 썼다. 괴산청년동맹 증평지부 간부 양희득·송용섭, 청주군 북일면 오동리 이종복의 집을 샅샅이 뒤져 소위 불온 서적을 압수해갔다. 또한 홍봉희가 담임을 맡고 있던 5학년 반장 임노선의 집도 가택수색을 하였다. 나중에 격문 사건은 임노선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고 홍봉희 교사는 경찰의 강압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1931년 6월 27일 오전 10시 홍봉희 교사가 퇴임 작별인사를 하자 전교생은 모두 통곡하였다.
홍봉희 교사 반이었던 5학년 40여 명은 선생님을 유임시키라며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당시 주재소에서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인근 주재소 인력까지 지원받아 주도 학생들에 대한 체포에 나서 5년생 5명, 6년생 1명을 검속하여 취조하였다. 그래도 동맹휴학이 계속되자 일제는 검속한 학생들을 즉시 석방시키고 학부형회를 열어 수습하도록 하였다.
내수초는 민족의 혼이 살아있던 학교였다. 이 학교에 학생독립운동기념 공원을 만들어 오동나무를 심고 격문도 복원하는 등 명실상부한 국가수호 사적지로 조성하여 호국역사를 일깨우는 배움터를 만들면 좋을 것이다. 행복씨앗학교가 성공하려면 훌륭한 주제의 선정과 개발이 필요함을 도교육청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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