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 김 주 희(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창을 열면 가늘고 노란 송홧가루가 창틀에 내려있다. 작고 노오란 가루들은 낮은 대기에 함초롬하다. 소나무에서 이 가루를 털어다 다식도 만든다고 어린 날 등굣길에 누군가가 말했다. 이웃나라에서 모래 바람이 쳐들어오고 몸에 나쁜 흉악한 먼지 만드는 온갖 물건들 사용하기 오래 전 일이고 보면 노오란 가루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눈에 익다. 이쁜 모양이 나오도록 틀로 찍어내는 과자도 떡도 아닌 다식, 언니가 혼인해 따로 살기 전까지 여러 가루들에 꿀을 섞어가며 꽃 모양으로 찍어내던 다식판이 어디 갔는지도 가뭇한데. 보이는 데마다 내려 앉아 노오란 빛으로 뜬금도 없이 어린 입맛에는 들지도 않던 명절 음식기억을 소환하는 좋은 오월. 
 지금 세상은 연록빛 천지이다. 나뭇잎도, 꽃잎도, 작은 풀잎도 투명한 연록이다. 햇살 말간 어느 날 오래 친해온 이는 이 계절이 제일 좋다고, 사는 게 아름답게 와 닿는다고 말했다. 이런 때는 초록으로 눈을 씻으러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진다고. 문청 시절 성품 순한 선배는 오월이라는 시에 새는 연록빛 울음을 떨군다고 썼지, 아마. 그 무렵은 학교 역사만큼 오래된 잘 자란 나무 아래를 걸어 하교 할 때면 무슨 노래인가를 습관처럼 흥얼댔던 것도 같은데. 어쩌면 그와도 발걸음처럼 곡조 맞춰가며 그 길을 함께 흥얼대며 걷다가 각자 집으로 가던 그런 적도 있을까.
 장미가 피고, 키 큰 나무는 하얀 꽃들을 가득 매달고 있고, 젖어있는 길을 걸어 집 앞 초등학교에서 투표를 했다. 울렁대던 심사에 비하면 아쉬울 만치 절차는 간략하고 장소는 한산했다. 물기 어린 길 위로 돌아오는 우산 속은 할 일 마친 안도와 허함이 함께였다. 내 할 수 있는 일은 했으니 뽑힌 이가 약속 지키기를 바랄 뿐, 함께 열을 앞날 기대가 남은 일이니. 최선이 없으면 차선을, 최악이 아닌 차악을 뽑는 거라고 무수히도 말하고 들어오면서 투표를 몇 차례 하는 동안 알게 된 건 말은 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만한 사람은 없는데 대표자에게 무한 기대를 들씌우던 무모함도, 알아서 잘 하겠거니 무한 신뢰를 보내는 무책임한 어리석음도 확인했다. 정치권력이 바뀌면서 세상은 잠깐 얼마쯤은 바뀌겠고 뭔가가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더해져야 할 일이 생겨나고, 단 번으로 끝낼 수도 없고, 건전한 견제가 건전한 권력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도. 다음 뿐 아니라 다음의 다음도, 그 다음의 다음도 나라가 존속하는 동안 시민감시는 매번 중요하리라는 것까지. 설마하니 그런 엄청난 일 뒤 보궐로 뽑힌 대표자가 전임자의 실수와 실패를 다시 반복하기야 할까 싶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사실을 목전에 확인한 터이므로, 온 나라가.  
 인간의 문제는 언제나 인간적이다. 인간의 삶이 이어지는 동안 끊임없이 필요한 무슨 일인가는 일어날 것이다. 영원한 해결은 없다. 당면한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불거진다. 그러니 인간이 존속하는 한 언제나 도전은 있고, 해결할 좋은 방법들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 좋은 것들은 ‘누구에게’가 아니라 ‘모두에게’ 공정할 것이다. 좋은 선택은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일 것이므로. 힘이 세어도 없어도, 많이 배웠어도 아니어도, 돈이 많아도 부족해도 서로 어우러져 한 타령 살아갈 좋은 세상을 만드는 그 일, 단지 공존이 아니라 공영해야 하는 그 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예우, 예를 갖추어 서로 대접받는 좋은 시절을 우리는 만들 수 있을까. 이제 표는 주었으니 지켜보아야겠다. 개인의 도덕성에 기대는 어수룩함 말고 건강한 시스템과 전문가가 책임지는 행정, 과정이 공정한 정의, 출발선의 평등도 고려되는 그런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국민에게 예의를 갖춰 예우하는지를.
 좋은 시절을 기대하며 곱게 내려쌓인 시간 같은 송홧가루를 닦아야 하려나부다. 거기서는 솔 향이 날까 송이버섯처럼. 초록은 이제 나날이 짙고 깊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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