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유신 투쟁 운동권 출신…노무현 통해 정치의 길 걸어
18대 박근혜 전 대통령에 고배…5년만 재도전 끝에 성공
당선증 수령 동시에 취임…화합·국민통합·포용력 등 과제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 후보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마련된 개표상황실에 도착해 당직자와 인사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동양일보 이도근 기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 후보의 청와대 입성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는 2012년 대권 도전에 실패한 이후 5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9일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18대 대선 당시 ‘노무현의 친구’라는 그림자에 가려졌던 문 대통령은 이번 대권 도전 땐 4.13 총선 승리,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사태 등을 거치면서 자신을 독자브랜드화 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최순실 사태에 따른 촛불정국, 박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문 대통령은 기존 야권은 물론 구 여권까지 합친 대선 주자들 가운데서도 명실상부한 1위 주자로 ‘대세론’을 확산한 것도 새로운 ‘대한민국호(號)의 선장’이라는 중임을 맡게 된 이유로 해석된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7개월 일찍 치러진 19대 대선. 문 대통령은 당선과 동시에 임기를 시작하게 된 만큼 ‘국민통합’을 위한 리더십을 선보여야 한다는 막중한 과제를 안게 됐다.

 

●반유신 투쟁…특전사 생활

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의 시골농장에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가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생각으로 월남한 것이 거제 정착으로 이어졌다.

문 대통령의 가족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산 영도로 이사했으나 연탄배달을 하거나 때로는 성당의 식사배급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가난했다. 가난한 집안형편에 부산의 명문인 경남 중·고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던 문 대통령은 술과 담배 등을 하며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실제 고교시절 4번의 정학을 받은 그는 이후 기자간담회 등에서 “이름 때문에 ‘문제아’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실제가 됐다”고 우스개를 하기도 했다.

1972년 경희대 법학과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반유신 투쟁에 나섰다. 1975년 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시위를 주도하다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석방되기 무섭게 강제징집을 당하며 특전사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에 투입될 정도로 ‘정예용사’였다.

1978년 제대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한 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책임감에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1979년 부마항쟁과 10.26,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구속됐다. 그가 2차 시험 합격소식을 들은 장소는 경찰서 유치장이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현 아내인 김정숙씨와 결혼해 문준용씨 등 슬하에 1남1녀를 낳았다.

 

●노무현과의 ‘운명적’ 만남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대통령이었지만 반유신 투쟁 등 사위 전력 탓에 희망했던 판사 임용이 좌절됐다. 변호사를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으며 ‘인생 제2막’을 맞는다.

첫 만남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합동법률사무소를 시작, 인권변호사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저서 ‘운명’에서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술회했다.

문 대통령은 재야운동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됐다.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5월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됐을 때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문 대통령이 상임집행위원을 맡을 정도로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 노 전 대통령이 13대 총선에 승리해 정치권에 진입했다. 문 대통령은 부산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나 노동운동 지원 일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 2002년 대선에 뛰어든 노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정계에 이름을 알렸다. 당시 노 후보는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며 깊은 정을 표현했고 문 대통령도 “노 후보가 당선되던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영원히 계속됐으면 하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후에도 문 대통령은 2번의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 등을 거치며 노 전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대권 고배 그리고 재도전 성공

노 전 대통령의 김해 봉하마을행과 함께 문 대통령은 경남 양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뇌물을 받은 의혹이 불거지자 변호인 겸 대변인 역할을 하며 노 전 대통령을 방어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장례 전반을 관장했고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는 정치권과 거리를 뒀다.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보선 국회의원 후보, 2010년 6.2 지방선거 부산시장 후보 등으로 거론됐지만 한사코 현실정치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정치 참여 압박 속에 결국 2012년 4.11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나와 당선되며 정계에 정식 입문했다.

2012년 첫 대권 도전에도 나섰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하며 분루를 삼켰다.

당시 그의 득표율은 48.02%(득표수 1469만표)였다.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의 득표율이자 득표수였지만 박 전 대통령이 51.6%(1577만3128표)를 얻어 승리한다.

18대 대선 실패 이후 문 대통령은 칩거생활을 하다가 2015년 2월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당선으로 다시 정계에 컴백한다. 이후 안철수 의원 등 비문(비문재인)계의 탈당·분당에 의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한 뒤 4.13 총선 승리 등으로 당내 유력 대권주자의 입지를 굳혔다.

이번 대선에서 홍준표, 안철수 후보와의 치열한 본선에서 승리한 문 대통령은 그 자신이 강조한 “시대를 바꾸고 정치를 바꾸고 경제를 바꾸라는 국민의 명령을 받들어 국민대통령시대를 열겠다”는 약속을 펼칠 기회를 잡았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조기대선 정국 과정에서 불거진 지역·세대·계층 간 분열과 갈등, 반목을 극복할 수 있는 ‘국민통합, 화합의 대통령 문재인’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선거과정에서 쌓인 앙금과 후유증을 조속히 털어내는 한편 승자는 패자에 대한 겸손한 배려와 손 내밀기를, 패자는 승자에 대한 승복과 협조를, 여야 모두 초당적 차원에서 엄중한 비상시국을 주도할 공동운명체적 '비상 리더십' 발휘도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프로필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 출생

1965년 부산남항초등학교, 1968년 경남중학교, 1971년 경남고등학교 졸업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 입학

1975년 학생운동으로 투옥, 서대문 구치소 수감,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 선고받고 석방

1978년 육군병장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 만기제대

1980년 경희대학교 법대 졸업, 22회 사법시험 합격

1981년 김정숙씨와 결혼(슬하에 1남1녀)

1982년 사법연수원 차석 수료(법무부장관상수상).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시작

1989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1995년 법무법인 부산 설립

2001년 노동자를 위한 연대 공동대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

2003년 청와대 민정수석

2004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2005년 청와대 민정수석

2007년 청와대 비서실장

2009년 5월 고(故)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2010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1년 혁신과 통합 상임공동대표

2012년 19대 국회의원(부산 사상). 민주통합당 18대 대통령 후보

2013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2016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2017년 더불어민주당 19대 대통령 후보 선출

2017년 5월 10일 19대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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