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근 <전 옥천문화원장>

박효근 전 옥천문화원장

내 나이 70대 중반인데도 5월이면 그리운 얼굴들 때문에 밤잠 설치는 날이 많다.
며칠 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29회 정지용문학상 시상식에 다녀왔다. 매년 5월 옥천서 열리는 지용제를 처음으로 개최한 문화원장이라서 초대되었을 것이다. 낯익은 전국 문학인 등 300여명이 함께했다. 대형버스 두 대를 꽉 채운 옥천지역 관계자와 주민들도 그들과 뒤섞여 감동적인 시간을 가졌다.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지용제’라는 뜻깊은 문학축제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잊을 수 없는, 잊어선 아니 되는 세 사람이 있다.
김성우 전 한국일보 고문과 고 김수남 전 색동회 회장, 그리고 시인이자 내 절친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이다.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는 조 회장은 당시 술만 먹으면 정지용의 시로 만든 가곡 ‘고향’을 불렀다. 

그 열정이 나에게까지 전달돼 옥천지용제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1988년 5월 15일 서울에서 열렸던 지용제를 옥천에서 6월 25일에 다시 개최케 된 것은 조 회장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1회 지용제를 두 번 치른 셈이다. 그 후 조회장은 옥천군의 요청으로 동양일보에서 지용신인문학상을 만들었고, 이제는 권위 있는 신인 등용 문학상이 됐다.

나는 옥천문화원장으로 1987년부터 2000년까지 재직하며 정지용 시문학 정신을 지역에 정착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 했다. 1회 지용제, 1995년 지용생가 복원, 1997년 연변 지용제 개최를 비롯해 지용시비제막, 지용흉상제막, 지용로 도로명 명명 등 많은 일을 거침 없이 해냈다. 후임원장(이인석)이 일본 동지사대학에 지용시비 건립과 국제포럼까지 해냈고, 현 원장(김승룡)은 지용제를 생가부근으로 옮겨 큰 호응을 받고 연변에 지용시비를 세우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도 보고 있다.

초창기 지용제에는 기관장들마저 보수단체 등의 반대로 참석하지 못했고, 시비를 세우는 장소 물색에도 큰 곤욕을 치렀다. 정지용 시비에 얽힌 사연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원래는 서울 문인들이 남산에 1호 지용시비를 건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지용시비 1호는 고향에 세우자고 주장, 속리산 국립공원에 가서 돌을 골라 다음날 옮겨왔다. 사실은 훔쳐온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이야기다. 현재 관성회관 옆에 있는 지용시비가 바로 그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비는 현재 우리나라 유명한 시인들의 시비 중 가장 아름다운 시비로 인정받고 있다.

올 해도 5월 19~21일에 지용제가 열린다. 기쁘지만 아쉬움도 든다. 이루지 못한 일들이 있어서다. 1994년 구읍 전체를 지용의 시심이 우러나오는 테마마을로, 시인이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용초로, 관성회관을 지용회관으로 건물명을 변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힘에 부쳐 못 이룬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김영만 군수의 큰 관심으로 2년 전부터 지용문학공원이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행사를 치르니 다행이다.

지용제가 지금에 이르는 세월동안 참으로 많은 일과 잊지 못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고 칭찬해 주셨던 1회 지용문학상 수상자인 고 박두진 선생과 고 구상 선생. 또 한분, 아버지를 추모하는 지용제가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 하시며 옥천문화원을 매일 왔다 갔다 하시던 정지용 선생의 장남 고 정구관 선생. 이들도 오월만 되면 생각나는 고마운 분들이다. 고인들도 하늘에서 지용제를 지켜보며 흐뭇해하실 것이다.

정지용 시인을 빼 놓고는 현대문학사를 말할 수 없다. 옥천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인물이자 추앙받아야 마땅한 문학인이다.
정지용의 시 중에 ‘고향’과 ‘호수’가 나의 애송시이다. 이 푸른 5월, 지용문학공원을 걷다 교동 저수지에 새겨진 시 구절을 읊조린다.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 감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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