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 거행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나는 조선도 민족자결의 취지로써 독립이 될 희망을 가지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그 취지를 건의하고, 한편 대사를 선언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밖으로 기독교 측에서도 그런 계획이 있어 쌍방의 의사가 합치되어 독립선언을 할 것을 결심하였다." 고 일본 경찰의 심문조서에 답변하였다. 이는 1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질서가 요구하는 평화적인 방식에 의한 민족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적시한 것이다.
의암은 1861년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에서 세금 징수를 하는 손두홍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적서차별의 아픔 속에서 부패한 관리들의 농민 수탈 현장을 목격하며 성장하게 된다. 12세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세금 징수한 40 냥을 관청에 갖다 바치러 가는 도중에 동사 직전의 행려병자를 그 공금으로 구해준 일이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사회적 약자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점차 성장하면서 특권계급에 대한 부정의식은 평등사회를 위한 사회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평등사회에 대한 염원이 22세에 그를 동학에 들어서게 하였다. '백성을 널리 구제하고 나라와 백성을 평안하게 한다.'는 동학의 정신이 바로 자신의 성장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는 2년 만에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의 신임을 받는다. 1888년에는 그의 누이동생이 최시형과 결혼함으로써 교단에서의 그의 입지가 더욱 강화된다.
의암은 1894년의 갑오농민항쟁에 적극 가담하였다. 최시형과 전봉준이 동학군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손병희는 한 부대의 통령으로 임명되어 옥천 영동을 거쳐 전리도에서 올라온 전봉준 부대와 합세하여 1895년 11월 9일 공주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한 치열한 전투는 동학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 주고 말았다. 손병희는 전라도로 패퇴하였다가 영동을 거쳐 보은 북실에 들어선다. 이때가 12월 17일이다.
그는 교주인 해월을 호위하면서 관동과 서해지방을 전전하는 피신생활 중에도 지하 포교활동을 하였다. 1897년 해월은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에 손병희를 제3대 교주의 승계자로 지목하였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동학에 대한 탄압은 서슬 푸르고 국정은 날로 썩어 들어가자 의암은 울분을 삭이며 1901년 일본으로 활동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름을 숨기고 지내며 망명객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등과 교유하며 유능한 청년들을 초빙하여 유학 장학금을 대주기도 하였다.
1904년이 되자 한국 의정대신과 법부대신 앞으로 정치 개혁을 건의한 장문의 서한을 보내는 한편,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한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국정개혁운동과 더불어 신생활운동의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을 전개한 것이다. 단발령을 받아들이고 있는 개혁 운동이라고 하여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대동회라고 하다가 중립회로 변경하였다. 이름을 바꾸었으나 소용없었다. 지방 여러 곳에서 탄압대상이 되었다. 동학도의 희생자가 속출하자 다시 이름을 진보회라 고치고 강령에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히 한다는 내용을 1조로 넣기에 이른 것이다.
의암은 서둘러 제자이며 교도인 이용구를 귀국시켜 진보회의 조직과 운영을 맡겼었다. 1905년 10월 8일 전국적으로 창립대회를 열었는데 지방 진보회원이 12만 명이 넘었다. 전국에 진보회 지부가 세워지니 지방 관료들은 동학당이 되살아난다고 난리를 쳤다. 이에 덩달아 놀란 정부는 해산 명령과 더불어 토벌 명령을 지방에 내린다.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은 것이 친일파 일진회였다. 그들이 정부를 상대로 구명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해 11월 1일 구금되었던 진보회원들이 모두 풀려난다. 이를 계기로 진보회는 일진회 조직으로 통합되어  을사조약을 지지 서명하는 친일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일진회가 친일파로 변질되자 교주 손병희는 1906년에 귀국하여 동학을 천도교라 고치고 1906년 9월에는 일진회에 계속 가담한 이용구를 비롯한 64명에 대한 출교처분을 내려 친일 분자들을 말끔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수운과 해월의 맥을 이어 끝까지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8월 보성사를 운영하며 천도교 기관지인 천도교월보를 창간한 후 각종 잡지를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운다. 특히 3.1만세운동 당시 대한독립선언서 2만 1천부를 인쇄하여 전국에 밀송하여 민족의 염원에 불을 지피는 삼일만세운동을 성사시킨다.의암 손병희는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일본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검거된 후, 1920년 10월 30일 징역 3년형에 형집행정지를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22년 5월 19일 병세가 악화되어 서거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의암을 친일파라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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