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길 <충청보건과학대 명예총장>

 지난 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7주년 기념식을 보면서 37년 전 광주에서의 학창(만학)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나의 대학생활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했다.

 1964년 농협대학 1학년(2기)때 6.3 사태에 대한 시위에 앞장섰다가 퇴교, 이듬해 충북대학 농화학과 2학년에 편입학하여, 다시 한·일 회담 비준반대 학생시위를 주도하다가, 청주경찰서에 연행·감금되기도 했고, 대학 당국의 무기정학처분을 받기도 했었다.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충청북도 농촌진흥원(현, 충북도 농업기술원)의 시험국 화학실험실에서 2년간 근무, 농업직에 대한 미래가 어두워, 공주 사범대학 부설 중등교원양성소 영어과를 수료, 1970년 황간중학교 초임 발령 후, 청주농고, 주성중에서 10년간 영어교사로 성실히 근무했었는데, 그때도 유신체제에 대한 성토로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1980년 5월, 나는 치과의사인 선친의 간곡한 권유로,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존경받고 보람 있는 교육계를 떠나, 전남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1학년(당시, 농학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어 치의예과 2년을 면제받음)에 재학중인,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딸과 어린 아들, 아내를 둔 가장이면서도 만학도였다.

 5월 초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성토대회가 연일 개최되었고, 5월 14일 부터는 광주 금남로 일대로 진출, 시민들과 가두 정치 집회가 대규모로 개최되고, 다양한 형태의 시위 활동이 전개되었다. 학교의 수업은 중단되었고, 나도 학우(평균 15살 연하)들과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참여했는데, 시위가 확산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부터 총칼로 무장한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집회와 시위를 진압, 18일 계엄군이 배치되면서 학생들을 연행, 군용트럭과 진압봉을 이용 무차별 구타해서 팬티차림으로 무릎 꿇게 하여 연행된 청년들이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웠었다.

 진압군이 학생들이 기거하는 하숙집들을 수색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한두 명 또는 서너 명씩 광주를 탈출하기 시작했었다. 나는 조선대 의과대학생과 전남역(수십대의 군용차량과 진압 병력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가운데)을 통하여 빠져나왔는데, 당시 가지고 있었던 공무원(교원)증으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어서 조치원으로 해서 청주에 무사히 귀향했었다.

 청주에 와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언론을 신군부에서 철저하게 통제했었기에, 광주 외 지역에서는 전혀 광주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고, 일본에 출장 중이셨던 선친이 일본에서 뉴스를 통해 한국의 사정을 먼저 알고 급히 귀국해 계셨다.

 나는 5.18 민주화 운동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몸소 겪었던 한 시민으로서, 그 당시 암울했던 나날들을 되뇌이면서, 만 4년간 피나는 노력으로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 없이 학교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공부해 1984년 치의학사 학위를 받고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치과의사가 됐다. 어느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 했었고, 전남 광주에서의 5.18 민주화 운동을 통해 느낀 것들을 거울삼아 시민의 소리를 대변하고, 시민들의 뜻을 모아 펼치는 시민운동이 절실하다고 느껴 충북시민회를 발족하게 된다.

 중앙단위로부터 내려오는 하향적 조직이 아닌, 지역사회 내에서 자생적으로 태동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우리고장의 권력감시, 주민참여, 풀뿌리 자치, 사회연대를 지향, 종합적 시민단체로 그 위상과 정체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단 한 푼의 보조금도 받지 아니하고 성장·발전해온 우리 충북시민회(현,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는 계속 새로운 희망과 보람을 만들어 갈 것이라 믿고 있다. 역사변혁의 현장이였던 광주에서 본 시민정신의 절심함과 위대함을 이 5월에 다시 되새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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