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이현수학장

이현수 학장.

(동양일보) 우리는 종종 지근거리의 무리 안에서 정치적 논쟁을 벌인다. 소모적인 대립임을 인식하면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믿고 싶은 뉴스에 기초한 정치평론가가 되기 일쑤다. 이윽고 이념체계와 객관성에 근거한 진영논리의 격돌이 아닌 자신이 처한 현재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보수와 진보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뿐인가, 우리는 대게의 시민이 혈액형별 성격을 의심 없이 맹신하며 또 일부는 혈액형으로 상대를 규정하는 사회다. 이럴 때 차용되는 혈액형에 대한 지식은 앨빈 토플러가 이야기한 ‘무용지식’일 가능성이 크다. 비과학적 논리와 표본도 안 되는 설익은 경험치 앞에 과학이 주는 삶의 태도는 무기력해진다.

같은 단어지만 뜻은 매우 이질적인 용어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그렇다. 이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의미지만, 일부에선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특정 세력을 배척하는 의미로 대체된다. 사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근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내 생각이 맞다’는 식의 절대적 믿음을 강요하는 근본주의는 사회공동체에 매우 불온하다. 자신 외에는 모두 틀렸다는 근본주의는 자기 정화 없이 신념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져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실 근본주의적 행태를 띄는 이들은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그 결론에 맞춰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입장을 전개해가는 확증 편향적 행태를 견지한다. 기도 안 찰 가짜뉴스가 소멸되지 않고 판치는 이유는 근본주의 소매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대 간의 인식 차와 양극화가 심화된 우리 사회에서는 제법 잘 팔린다.

사회에 오로지 양극간의 두 가지 주장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획일적 사회라는 뜻이다. 합리적 의심은 건강한 사회의 조건이다. ‘진영논리’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편 가르기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이들에 의해 확대재생산 되어져 왔다는 것을 말한다. 분별 있는 농익은 시민의식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태도는 민주시민의 소양이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와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안톤 지더벨트의 역작인 ‘의심에 대한 옹호’는 무수한 선택을 강요받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딴지를 걸기위한 행위가 아니라 진리를 찾으려는 인간의 성찰이다.

사고의 다양성은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산소이다. 생각이 달라야 창의적이다. 근본주의는 ‘의심의 배척’이다. 그러나 의심은 그릇된 판단을 유보한다. 섣부른 결정에 대한 필터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의심이 의심받아야 할 때가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피터 버거와 안톤 지더벨트의 말을 빌리자면 ‘건전한 의심’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말해 ‘건전한 의심’은 휴머니즘에 근거한다고 그들은 역설한다. 고약한 불신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오롯한 기대를 뜻한다.

역사는 진실대로 현실은 진실로서 정리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용 없는 진영논리가 판치는 우리사회에서 더 큰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위선과 가공된 정보로 상대를 자극하고, 그래서 상대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어서는 안 된다. 사회공동체의 튼실함을 위해 진실로 가는 첫걸음은 ‘합리적 의심’이다. ‘건전한 의심’이다. 믿고 싶은 주장에 천착하고 편취된 현상을 이용해 사익을 취하는 극단적 세력이 득세하는 시대, 열린사회를 지키는 것은 합리적으로 건전하게 의심하는 것이다.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되는 이 절박한 시기에 극단에서 소용돌이치는 극우와 극좌는 건강한 의심을 부정했으며 루머에서 비롯된 확신을 진영논리로 확대재생산했을 뿐이다. 참된 진보와 보수의 태동이 간절한 시대이다.
건강한 주장은 몽니가 없다. 균형 잡힌 합리적 의심의 토대위에 다른 의견에도 발끈하지 않으며 입장의 차이라고 포용하는 자세가 사회통합의 단초라고 여긴다. 지지하는 정당의 주장을 맹신 하지 말고 시민으로서의 역사적 경험에 기대여 의심해보고, 열린 의사결정의 건강함을 따르고, 권위가 아닌 합리적 민주주의의 힘을 믿는 것이 정치개혁의 힘이다. 역사는 늘 ‘합리적 의심’을 옹호해왔다. 이 사실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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