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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세이-할아버지의 미소
동양에세이-할아버지의 미소
  • 김묘순
  • 승인 2017.05.30 2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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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수필가>

며칠 전 막을 내린 30회 지용제에서 영일(迎日)정씨 한 분이 초대시낭송을 한다. 나비넥타이와 수려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지용과 항렬로 따지면 ‘할아버지’가 된단다. 정지용은 참 젊고 멋스러운 할아버지를 뒀다. 충북도청에 근무한다는 정지용의 할아버지는 정지용 이야기만 나오면 입이 연신 벙글거린다.

그 미소 속에서 잊을 수 없는 나의 할아버지가 피어난다. 할아버지는 그러하셨다. 정지용의 할아버지처럼 사람들 입에서 손녀 이야기가 나오면 참 좋아하셨다.

서당 훈장을 지내시며 귀한 책을 구하러 쌀을 짊어지고 수백 리 먼 길을 걸었다던 할아버지. 붓글씨로 책을 다 정리해 필사본으로 묶은 다음 집으로 돌아오시던 그는 서당이 신식교육에 밀려 빛을 잃자 사랑채에서 온종일 책과 마주하셨다.

타향에서 지내다 고향에 다니러 온 사람들과 동네에 긴한 볼 일이 있는 이들은 할아버지께 먼저 인사를 왔다. 그들 손에는 영락없이 소주 대병이 들려있었다. 우아하게 꽃이나 과일을 사오지는 않았다. 가끔 과일을 들고 오는 이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주 드물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나와 소주 대병은 ‘풍마우불상급(風馬牛不相及)’이니 자연히 할아버지를 향해 입을 내밀고 투정을 부리다 손님께 절을 했다. 무릎이 닳도록 절을 했다. 어떤 이는 예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다른 이는 손녀의 예절교육이 잘 됐다고 할아버지께 칭찬을 했고, 독특한 이는 지폐로 절값을 대신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다. 어릴 적 나는 무척 어리석었다. 아니면 영악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지 내 기억은 그렇다. 절을 하였을 때 오는 것은 기분 좋은 것들이었다. 다만 할머니께서 해어진 무릎을 깁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나의 가정교사였다. 부모님은 생업에 분주하시고 할머님은 온 동네 사람들의 생일과 제사까지도 다 기억하시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셨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모든 것은 할아버지를 통해 알아내야만 했다.

중학교 여름방학 가정숙제가 ‘기초5군식품’을 그림과 함께 그려오기였다. 큰 켄트지를 샀다. 그곳에 맞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5등분을 하여 1군식품부터 그려야했다. 컴퍼스로 큰 동그라미를 그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켄트지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내 앞에 할아버지는 쟁반을 들고 오셨다. 맞았다. 큰 동그라미가 켄트지 안에 편안히 들어앉았다. 며칠을 걸려 할아버지와 함께 곡류, 과일류, 생선·육류, 우유 및 유제품 등을 그려 숙제를 완성했다.

어느 날 사랑채에 불이 났다. 타다만 책상과 고서들이 마당에 물범벅을 하고 널려있었다.

삼동이라는 일꾼이 있었다. 오전 새참 먹기 전까지는 멀쩡하나 새참 먹을 때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고 논두렁을 베고 자는 그가 이날도 사고를 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소죽솥에 장작불을 잔뜩 지펴 놓고 졸았고 그사이 사랑채 방바닥이 과열되어 불이 나버렸다.

다 읽은 신문지에 붓글씨를 쓰시던 할아버지. 닳아서 배가 쑥 꺼진 벼루에 몽당 먹을 가느라 손가락 모두를 푹 담갔던 나.

1800년대에 태어나서 굴곡지고 궁핍하게 살다 가신 할아버지. 그에게 붓글씨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한지 한 트럭, 붓 스무 자루, 벼루와 먹 열 개쯤 준비해 드리고 싶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꼭 닮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술도 잘 마실 줄 안다는 고백도 늘어놓고 싶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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