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시인)

(동양일보) 6월의 첫날입니다. 신록이 짙어가는 이맘때면 가끔 오뉴월 보릿고개의 어린 시절이 아슴아슴 떠오릅니다. 어른들은 일하느라 죄다 논밭에 나가있고 마땅한 놀이상대가 없던 텅 빈 시골집에서 유일한 낙은 ‘마루’와 장난치며 노는 일이었습니다. 애완견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마루’는 선한 눈망울에 회색빛이 도는 영리한 토종개였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와 보니 녀석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알고 보니 읍내 개장수에게 팔려갔다가 도망쳐 와서, 몇 번인가 컹컹 대며 집 주위를 돌다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애완견 ‘마루’와의 생이별을 초등학교 3학년의 어린 감성으로 삭이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이었고,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문 대통령이 키우던 같은 이름의 풍산개 '마루'가 청와대에 들어 가 '퍼스트 도그(first dog)'로서 살아가게 됐다는 소식에 반가웠습니다.

청와대 발 뉴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유기견 ‘토리’ 스토리가 또 하나의 화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도살 직전의 유기 견에서 '퍼스트 도그(first dog)'의 반열(?)에까지 오른 셈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토리’는 한 동물단체의 구조로 살아남은 유기견인데 털이 검다는 이유로 2년 넘게 입양이 되지 않고 있다가, 이번 대선 기간 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면 입양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청와대에 들어가는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에서는 대통령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 아주 보편화 돼 있어서, 언론에 가끔 다루기도 하고, 실제로 ‘퍼스트 도그’가 의전의 일정부분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합니다. 예를 들면 외국 정상들을 초대한 자리에 참석해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물꼬를 트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퍼스트 도그’가 크게 주목받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이번 ‘토리’스토리를 계기로 역대 대통령과 함께 했던 반려동물의 사연도 얘깃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산 유명한 사냥개를 길렀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진돗개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명견을 가졌고, 전두환 前 대통령이 키우던 진돗개 '송이'와 '서리'는 전두환 대통령의 재산이 추징당하면서 2003년 경매에 부처지게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관계 정상회담의 상징으로 풍산개를 선물로 받아 오기도 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봉하 마을에서 지낼 때, '누리'라는 보더콜리 종 애완견에게 각별한 정을 주기도 했다 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청와대에서 키우던 진돗개, '청돌이'를 사저로 데리고 갔을 정도로 유명한 애견인이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는 2013년 청와대에 입성할 때 진돗개 '새롬이'와 '희망이'를 선물로 받았는데, 불행한 사태로 인해 삼성동 사저로 거처를 옮기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유기견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일부 새끼와 함께 ‘진도개혈통보존협회’로 입양되었고 남은 새끼는 일반가정에 분양되는 씁쓸한 결말을 맞기도 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진돗개는 주인에게 아주 충성스럽고 영민하며 귀소본능이 뛰어난 명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전히 우연이겠지만 청와대의 진돗개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인 탓(?)에 그리 좋은 견(犬)생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이번 청와대로 입양절차를 밟고 있는 유기견 ‘토리’는 어쩌면 세계 최초로 유기견이 ‘퍼스트 도그’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습니다. 청와대라는 기존의 고답적 이미지를 덜어내는데도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며 청와대에 초청되는 각국 귀빈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번 청와대 반려견 ‘토리, 스토리’가 잠깐의 이야깃거리가 아닌 ‘편견이 없는 사회’, 약자를 위한 사회적 배려의 상징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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