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수필가>

지난 해 중환자실에 몇 개월 누워 지낼 때는 동네 골목길이라도 한 바퀴 돌아봤으면 하고 화려한 외출을 꿈꾸기도 했다. 그런 탓일까, 가족여행을 하자는데 이내 콧등이 시려왔다. 손자손녀 앞세우고 하는 여행은 이번이 마지막일 듯싶다. 말이 나오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행일정은 잡히고 모두들 휴가까지 받아 놓았다.

부산항 신터미널에서 후쿠오카 시모노세끼 행 부관훼리호에 올랐다. 떠나기에 앞서 아들은 군기를 잡듯 규칙을 세웠다.

“이번 여행 중에는 무엇을 하든 할머니께 먼저 여쭙고 시행하는 거다”

무엇을 알까마는 증손녀 코 흘리개들 까지 규칙에 따른다는 조건이었다. 4박5일간 많은 사적을 둘러보는 동안 규칙을 따른 덕분에 일사분란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 중 몇 가지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뇌리에 남아 있다.

그 하나는 스와노에서 만난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다. 어린시절 들었던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는 먼 데서 들려왔다. 아득히 먼 옛날의 슬픈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듯 가슴이 아렸다. 일제강점기 강산이 무너질 듯 소리치며 달리던 그 증기기관차는 군기와 알미늄 ‘벤또’(도시락)를 싸 들고 공장가는 큰 애기들 실어 나르던 차와 겹쳐졌다. 여행 3일째 도키와 조각공원. 입구 대형간판이 한글로 ‘봄 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가타가나로 ‘하루’라고 조그맣게 쓰여 있다. 놀이방에 다니는 아가들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글자냐고. 아가들이 합창하듯 봄 봄 하고 큰소리로 답한다.

한글이 국제어로 통용된다는 게 얼마나 큰 자부심이 드는지 가슴이 뿌듯하였다.

공원은 완연한 봄이다. 동백과 매화 만발하고 나뭇가지의 물오르는 소리에 파릇파릇 깨어나는 빛깔이 그렇다. 하늘에 닿을 듯 가지를 드리운 천년 조선소나무며 세계 비엔날레 대상 수상 조각품들이 품이 너른 호수를 배경으로 더욱 빛났다. 그 한가운데 임상옥 조각가의 작품이 의연하게 서 있어 기쁨이 두 배나 되었다. 눈길 돌리는 곳마다 한국의 숨결이요 한국의 자연이이요 한국의 봄이다.

공원을 나오면서 휴게실에 잠시 머물렀다. 아가들은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약속이나 한 듯 달려가다 나를 빤히 바라본다. 먹고 싶다는 신호인 듯하여 에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려주었더니 세 녀석 모두 맛보라며 내 입이 닿을 듯 내밀었다.

시모노세끼에서 카라토시장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시모노세끼를 여행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럴 만큼 시장은 흥성스러웠다. 시장 안에는 생선초밥 일색이다. 생선도 광어 가자미 민어 농어 새우 연어 도미 가지각색이다. 우리는 인파를 뚫고 들어가 살점도 두툼한 생선초밥을 각기 골라 담았다. 한 개에 엔화로 백 엔이다. 홀이 따로 없는 시장이다 보니 해변가 길 맨바닥에 자리 잡았다. 내 앞에는 두 개의 크고 작은 도시락이 배당되었다. 하나는 내가 고른 초밥이고 다른 하나는 왕새우튀김이 아홉 마리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두들 제상 앞에 앉아 웅감하는 조상을 바라보듯 젓가락은 들지도 않고 나만 바라본다. 그제야 왕새우가 같이 먹자고 말을 한 것 같다.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이번 가족과의 여행은 많은 것은 보지 못했어도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자손들에게 인성의 장이 되었으면 했는데, 뜻을 이룬 듯하여 무엇보다 마음이 흡족하였다.

꼭 우리 아이들에게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아이들이 성공이나 경쟁을 먼저 배우지 말고 사람됨을 먼저 배웠으면 좋겠다. 물레방아는 곡식의 가루를 얻는데 필요하고 인성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참된 길이다.

귀국선 뱃머리에서 본 일출은 장 보아 온 해돋이건만 유달랐다. 배는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일행은 곧 바로 자갈치 시장으로 향했다. 때마침 만선의 고깃배가 갈매기떼의 군무와 함께 장관을 이루며 입항하고 있었다. 개장을 앞둔 상인들의 몸놀림이 분주했다. 진열된 생선들은 꽃밭처럼 화려했다. 아침상에 오른 찐 꽃게는 그대로 꽃이다. 여행을 즐겁고 기쁘게 마친 것을 자축하는 우리 가족의 마음도 꽃처럼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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