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원(신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동양일보) 조선시대 일어난 대표적인 전란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이 있다. 주변국인 일본과 후금이 급성장하면서 우리나라에 견제구를 던졌는데 결국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임진왜란은 전국시대 승리자인 풍신수길이 조선에게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먼저 항복하고 길을 열어달라고 하였는데 갑론을박을 하며 안이하게 대처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에 반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북방의 정세변화로 신흥 군사강국이 된 후금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여 자초한 것이다. 물론 일본이나 후금이 전쟁을 일으킨 배경에는 조선정벌의 야욕과 이를 통해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들 전쟁을 되돌아보면 당시 조선의 대응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먼저 왕과 조정대신들의 오판과 오만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전국시대를 맞이하면서 국력이 성장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전통적으로 야만국이라고 멸시했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오만과 풍신수길에 대해서 쥐의 눈으로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라는 오판이 빚은 참극이다. 두 차례 호란 역시 강성해진 후금의 실체를 모르고 오랑캐라고 멸시하며 배척하는 외교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기 어려웠다면 광해군처럼 명과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하는 한편 후금을 자극하지 않는 줄타기 외교를 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정권을 담당한 인조와 서인들은 광해군의 정책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였다. 이러한 지도층의 오판과 오만은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백성들은 환난을 겪어야 했다.

둘째 전쟁이 일어났을 때 왕이 보여준 이기적인 태도를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나 두 차례 호란을 당한 인조는 전쟁이 나서 한양을 수호하기 어려워지자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선다. 선조는 평양성으로 파천을 했다가 전세가 악화되자 의주로 피난을 나선다. 이때 대신들이 평양성 사수를 눈물로 호소하였으나 끝내 의주로 떠났다. 인조는 우리 역사상 수도를 가장 많이 버린 왕이다. 이괄의 난 때는 공주로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그리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였다. 더구나 일제의 식민지에 맞먹는 치욕적인 협상을 맺고 우리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삼전도비도 세웠다. 아무리 왕이라고는 하지만 백성의 안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만 살겠다고 이리 저리 피난을 다니는 왕은 더 이상 지도자라고 할 수 없다.

셋째 왕의 자식에 대한 지나친 견제의식을 들 수 있다. 선조는 평양성이 함락되자 자신이 화를 당하면 왕조가 끊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구성하여 본인은 의주에서 안전하게 피난생활을 하고 광해군은 근왕병모집을 위해 전국을 누비게 하였다. 광해군이 왜적에게 둘러싸고 있던 전쟁터에서 분조를 지휘하자 피난 갔던 관리들이 모여들고 의병을 규합하여 분조에 합류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분조가 적극적인 항전활동을 하는 시기에 명나라 원병이 조선에 들어오고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하자 선조는 분조를 없앴다. 하지만 피난에 급급했던 본인과 달리 민가에서 자거나 노숙생활을 하면서도 끝까지 백성들을 위로하고 의병들을 독려했던 자식이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라서였는지 선조는 승하하기 직전까지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에 대한 견제를 그치지 않았다. 인조 역시 정묘호란 당시 소현세자에게 분조를 맡기고 본인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으며 병자호란 때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三拜九叩頭라는 항복의식을 치렀다. 이때 소현세자는 인질로 잡혀갔다. 인질생활동안 소현세자는 중국대륙을 통일한 후 신생대국으로 발전해가는 청나라에게서 군사강국의 면모뿐만 아니라 문화대국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인조는 여기에 거부감을 느꼈고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왕위 역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아닌 봉림대군에게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겪은 전쟁이 오늘날 큰 울림을 주지는 않지만 지도자들의 올바른 판단과 처신이 국민에게 불신과 불안감을 낳게 하기도 하고 그 반대도 가져온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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