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이 <동화작가>

어느 날 아침에 주방 창문을 열고 연못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마당가에 그늘을 만들고 싶어 다른 나무보다 빨리 자란다고해서 심은 나무지만 어찌된 일인지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없이 자랐다.

나는 느티나무와 눈을 맞추다가 문득 지난해 어느 날 아침에 느티나무를 타고 오르던 나팔꽃을 걷어내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에 창문을 열고 보니 느티나무 허리춤에 나팔꽃이 오르고 있었다. 보랏빛 꽃잎이 신비스럽도록 아름다운 나팔꽃은 온몸으로 느티나무 허리를 끌어안고 까치발을 든 채 아침이슬을 훔치고 있는 듯해서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아침잠을 털고 제일 먼저 주방 창문을 열고 그 나팔꽃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일과의 시작이었고 행복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느티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축 쳐진 어깨위에 허드레 웃음을 얹혀놓고 내 눈치를 살피던 남편의 모습이 그려지곤 했었다. 남편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으로 유통업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퇴직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무실 임대료 등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사업을 접고 말았다. 지금은 다른 사업을 구상중이라며 쉬고 있지만 말이 사업 구상 중이지 사실은 할 만한 사업도 없을뿐 더러 있다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우리 부부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남편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남편과 마주칠 때마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런 아내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남편은 전에 안하던 집안일도 하고, 가끔은 살가운 말로 가슴속에 숨겨둔 내 울화를 녹여주려고 애를 썼다.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해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해주기를 바랄 때는 화가 났지만 그나마 내가 아이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고마운 일 아니냐고 스스로를 달래곤 했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숨겨 두었던 욕심이 자꾸 밖으로 나오려고 해서 애를 먹곤 한다. 그렇게 욕심이 고개를 내밀 때면 느티나무를 바라보게 된다. 빨리 자라 여름이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기를 간절하게 바랐건만 겨우 잎사귀 몇을 달고 위태롭게 서 있는 느티나무를 볼 때마다 남편의 모습과 닮은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그날 아침에, 나는 느티나무를 온 몸으로 껴안고 오르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나팔꽃 줄기를 거두어 내렸다. 채송화, 봉선화, 나팔꽃 등 우리 꽃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힘겨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내가 부부라는 인연을 내세워 그이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나팔꽃이 느티나무를 옭아 메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팔꽃 줄기를 거두어 내리는 내 손끝이 시렸다.

아침 햇볕을 오전 내 가슴에 담았다 놓치지 않으려 꽃잎을 꼭꼭 여민 체 하루를 견디는 것이 꼭 우리네 삶과 닮은 것 같아 좋아하던 꽃이었다. 나팔꽃을 후드득 뜯어 내린 내 손을 내려다보는데 또다시 남편으로 인해 내 처지가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살면서 마음과 달리 행동해야하는 처지에 이르렀을 때만큼 삶이 구차하게 느껴질까 싶었다.

이제부터라도 내안에 담긴 욕심을 쏟아버리고 그 빈 그릇에 내 이해심을 담아 남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어야겠다. 이런 다짐을 하고도 앞으로 환절기마다 앓던 몸살처럼 내 마음을 쑤석거리며 피어나는 욕심이 반복해서 찾아와 나를 곤혹스럽게 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팔꽃 줄기를 걷어내었듯 나의 부질없는 욕심을 후드득 걷어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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