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희 <세종시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대표>

추억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다’는 뜻이다. 지나간 추억은 너무나 많다. 힘겹게 달리는 시골버스나 이른 새벽 추운 기차역 부근의 국밥집이나 아니면 장마 속을 헤집고 들어간 섬 속에서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이거나 진눈개비를 맞으며 산을 넘고 들을 건너 고향집을 방문한 일들이다.

추억은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마음속에서 강하게 흔드는 손짓처럼 우리들 가슴에서 빛난다. 나에게 가장 빛나는 추억은 어느 것일까.

눈을 지그시 감아 본다. 한국전쟁의 비극이 끝나고 얼마 후 부친의 전근으로 다니던 대전 선화초등학교에서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후복구 작업이 한참이던 서울을 그야말로 눈감으면 코 베어가던 시절이었다. 네온등이 여기저기서 번쩍이고 길 가운데로 전차가 다니고 시발택시들은 요리조리 다니며 정신을 빼가고 있었다. 저녁이면 시내는 온통 백열전구로 밝혀져 대낮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전기불은 저녁 9시면 전기가 안 들어오기 때문에 일찍 자야했고 서울 남자애들은 자기 형(兄)을 언니라고 부르고 있어 바보라고 놀렸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에 외삼촌이 오셨는데 부친께서 내게 서울을 안내해 주라고 시키셨다. 하지만 나는 몇 번 시내구경을 했지만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부친께서는 전차를 타고 목적지에 가서 내려 시내를 구경하고 다시 전차를 타고 오면 된다며 나를 격려하셨다.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외삼촌과 전차를 타고 명동에 내려 미도파백화점과 서울시청, 명동을 모시고 다녔다.

그러다가 일정을 마치고 전차를 타러 명동역으로 오는 길에 데모대를 만났다.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경찰들과 대치하는 국면에서 경찰기마대가 출동했고 구경에 넋을 잃은 나는 외삼촌과 헤어지게 되었다.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외삼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어둠은 찾아오고 나는 집을 못 찾으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명동 전차 역에서 전차에 돈암동이라고 쓴 행선지 표시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나는 전차표도 없고 돈도 한 푼 없었다. 모두 외삼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 전차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몇 정거장을 따라가다 놓치고 말았다. 전차가 나보다 더 빨리 달렸기에 놓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없이 다음 전차를 기다리다가 또 따라 달리기를 반복하여 눈에 익숙한 동네거리를 발견하고 우리 집도 찾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추억한다, 밥상을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던 부모님의 미소를.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세계로 향하려는 내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추억은 연어의 회귀본능 같은 것이고 몸과 마음은 모름지기 생각의 지배를 받지 않던가. 그리고 설사 슬픈 추억이 있다 해도 그것을 꺼내어 이해하고 용서하며 새로운 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추억은 나를 꽃피우는 생명의 춤이 되고 나만이 출수 있는 추억의 춤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 살다가 힘들어질 때면 추억의 한 자락을 꺼내어 보자. 추억의 별들을 꺼내어 심포니의 지휘자처럼 연주 할 수 있으면 우리 안에서 황홀한 기쁨으로 흐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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