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소설가)

 

(동양일보) 웬만한 시골집에 ‘광’이라는 것이 있다. 세간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곳간을 말하는데, ‘곳간(庫間)’이란 ‘여러 가지 물건을 간직해 두는 곳’이므로 ‘광’의 한자어인 것이다. 여기서 ‘광 즉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말이 나왔다. ‘자기네 살림이 넉넉하여야 다른 사람을 도와주게 된다.’ 라는 말이다. 이렇게 광은 갖가지 사람에 필요한 많은 물건들이 쟁여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들이 간수돼 있어야 하는데 그 안엔 거개가 1년도 2년도 10년도 20년도 어떤 건 4,5십 년이 넘도록 방치돼 있거나 또 어떤 건 얼마나 오래 됐는지 상하고 썩고 녹슬어서 아예 폐물이 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이것들은 다 들어올 땐 성해서 쓸모 있거나 며칠 몇 개월 만 소용되고 옮겨진 소위 새것들이었다. 한데 왜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되고 사장돼 있는 것일까. 오월로(五月爐) 때문이다. ‘오월로’란 ‘오월의 화로’라는 뜻으로 ‘당장 필요하지는 않아도 막상 없으면 아쉬운 물건’이라는 걸 비유하는 말이다. 5월은, 따뜻한 봄이 많이 지나가고 더워지는 초여름의 문턱에 있다. 그래서 방안의 온도를 높여주고 사람의 추운 몸을 녹여주는 화로(火爐)가 제 몫을 다하고 이제 광 즉 곳간으로 들어가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달이다. 그런데도 아직 화로를 섣불리 치우지 못하고 있다. 왜? 치우자니 어쩐지 그간 끼고 살아온 정리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맴도는 날씨 앞에서 그 화로가 주는 따스한 온기의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미련으로 남기 때문이다.

“얘 둘째아가, 그것들 아직 성해서 더 입을 수 있잖느냐?” “어머니, 이거 철 지나고 유행이 지난 거라 입을 수 없어요. 아파트 수거함에 내다 버리거나 헌옷 수집하는 데 갖다 줄 거예요.” “아니다 아깝다 이리 다구 버릴 거면 내가 가져가겠다. 그리구 지난번에 왔을 때 가져간 고기 굽는 석쇠 그것두 내 잘 쓰고 있다.” “프라이 팬요. 그거 오래 써서 바닥코팅이 벗겨지려고 하는 건데 그거 아직두 쓰고 계셔요?” “아녀 괜찮여, 생선만 잘 구워지드라. 바닥이 좀 허옇게 닳기는 했지만서두.” 하지만 거짓말이다 한 번도 쓰지 않고 곳간선반에 있다. “아녜요 그거 인제 쓰지 마셔요. 건강에 나빠요. 그렇게 된 거 쓰면 암 있지요 암 그거 걸리기 쉽대요.” “알았다 그나저나 아직 성한 거 무작정 버릴라구만 하지 말구 시굴루 연락해라 내 다 가져갈 테니. 다 두면 언젠가는 긴요하게 슬 때가 있으니께.” “무작정 버리려는 게 아녜요. 보셔요 어머니, 아파트에 시골처럼 새 물건 헌 물건 쌓아 두는 창고 같은 곳간이 있어요, 헛간이 있어요, 나뭇간이 있어요, 벽장이 있어요? 물건 둘 곳이라곤 좁디좁은 다용도실에다 이불이며 옷 몇 벌 걸어두는 붙박이장과 싱크대 위에 매달려 있는 찬장이 고작인 아파트인데, 매일 매달 철철이 먹고 쓰고 입는 것들을 어떻게 다 보관만 해 둘 수 있겠어요. 당장 소용되지 않는 것들은 없앨 수밖에요. 그래서 아파트에 살려면 버리기부터 배워야 된다고, 버려야 산다고 하는 말까지 있어요.” “그건 그렇다구 하자. 그런데 너 금방 찬장 애길 했지. 그걸 우리 때는 ‘살강’이라구 했다. 그릇 같은 것을 얹어 놓기 위해서 부엌 벽에 드려 놓은 선반이지. 그 살강에 설거지한 막사발이며 놋그릇 따위를 얹어놓곤 했지. 시방은 나오지도 않아 구경도 잘 못하는 물건 아니냐. 그걸 버리지 않고 두었더니 니들 내외가 귀한 거라며 갖다가 찬장에 진열해 놓지 않았느냐?” “그건 골동품 가치가 있는 거지요.” “여하튼 당장 소용되지 않아도 버리지 않고 두면 언젠가는 소용 있게 된다 이거제.” “근 그래요. 그렇지만….”

이만 해두고 시어머닌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할머니의 보따리를 확인한 장손 놈이 볼먹은 소리를 한다. “할머니, 이번엔 또 옷가지예요? 맨날 가져오기만 하고 쌓아만 두었지 한 번도 입으시는 거 못 봤어요. 나한테 맞는 것두 없구.” “그래도 성한 걸 버린다는데 아깝지 않느냐?” “그럼 입으시든가 나한테라도 맞는 걸 가져오시든가 해야지요.” 그러더니 곳간 쪽으로 옷소매를 잡아끈다. “보셔요. 이것들도 그래요. 지금은 쓰지도 않는 구닥다리 농기구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쓰시던 옛날 헐어빠진 물건들 또 할머니가 작은 집에서 가지고 오신 것들, 버리자니 정들고 아깝다고 하시지만 그리고 언젠가는 쓰일 때가 있다고 하시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썼거나 쓰인 일 있어요? 진즉에 제가 깨끗하게 정리할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할머니 맘 상하시게 하지 말라고 말려서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할머니께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야겠어요!”

오월로가 몸에 밴 할머니로선 어떤 게 옳은 일인지 착잡하기만 하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