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연(극동대 초빙교수)

 

(동양일보) 1960~70년대 하늘을 찌를듯한 고교야구의 열기에 힘입어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필자는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과 이듬해 한국시리즈 우승과 MVP라는 영예를 안았고 지역에 기반한 프로야구는 많은 인기속에 발전했다. 물론 오늘의 야구선수들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만큼 적은 연봉이었지만 야구선수로서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필자는 1986년 또 한차례 홈런왕을 하면서 우승을 했고, 1987~88년 3연패라는 대기록을 만들면서 1988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코치로서 프로야구에 몸담고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IMF의 영향으로 해태타이거즈는 무너졌고 기아타이거즈로 거듭나면서 야구를 떠났다. 과연 야구를 떠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다. 평생 야구만을 위해 달려왔던 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만큼 큰 충격이었다. 특히 후배에게 감독자리를 내줘야만 했던 것은 인생의 큰 오점으로 남았다. 왕년의 홈런왕이요, 우승의 주역으로서 해태의 중심이었던 내자신을 너무 믿어서였을까. ‘다음 감독은 나’라는 해태를 떠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고 무거웠다. 광주 야구장을 떠나 혼자만의 생각을 하다가 순간 한가지가 떠올랐다. 항상 후배들에게 강조했던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생각하면서 야구를 해라, 한가지만 고집하지 말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타격 기술이나 야구의 전술을 파악할 줄 아는 선수가 돼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야구가 최선이라면 그럼 차선을 찾자. 곰곰 생각 끝에 어릴적 꿈이었던 체육선생님을 생각했다. 1급 정교사 자격증이 있어 불가능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놓았던 책을 다시 잡았다. 선수시절 다른 선수들이 싫어할 정도로 원정경기를 가도 내 손에는 영어책이 떠나지 않았다. 또한 체육학 서적들을 많이 봐 왔던 터라 다시 하는 공부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시련도 있었다. 야구를 떠나 생활하다 보니 대인기피증이 생기고 우울증까지 와 그야말로 멘붕상태가 됐다.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책에 몰두하다보니 모든게 잊혀져 갔다. 참 다행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나이가 많아(당시 48세) 교사로 채용하겠다는 학교는 한 군데도 없었다. 차선이 엉그러졌으니 다음 것이 절실했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살라 했던가. 다시 야구장을 찾아코치자리를 물색했다. 모두가 냉랭했다. 해태를 떠난 김봉연의 존재는 어디에서나 알아주지 않았다. 또래가 감독을 하고 있으니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다고 내심 결론짓고 다시 공부하기로 했다. 하다보면 길이 있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말이다. 그 순간 한가지 교훈을 얻었다. 환경에 지배를 받고 사는 동물중 가장 민감한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프로야구선수를 그만 둘때까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면서 살아 온 것만 생각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에게 프로정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은 이때였다. 리더십·팀웤으로 일궈왔던 지금까지의 생활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은 가만히 있었는데 나 혼자만 외롭고 괴로워하면서 의기소침했다. 기죽지 말자고 크게 외쳤다. 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외치면서도 한쪽에선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도 했다.
결국은 프로야구 선수와 코치로서 바빴던 중에도 남모르게 학업(체육학 학위) 준비를 했던 게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고 끝내 교수가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교수생활의 첫째 조건은 학문연구지만 운동선수 출신으로서는 남보다 더한 체력 또한 필수 였다.
운동생리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었다. 사회생활하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아직도 건강해 보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좋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가 속해 있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 남자는 책임감이 많기 때문이다.
바쁜 중에도 체력과 건강을 위해서 자기 몸을 살피다 보면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나 누구를 만나든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100세 시대에 살고 있다.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출신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 중 한명이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고 앞을 보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지금도 몸 담았던 대학을 정년퇴직하고 초빙교수로 계속 강단에 설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도 건강이 허락되지 않으면 거품에 불과하다. 프로 야구 원년 홈런왕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필자가 항상 고마워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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