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경 <시인>

양귀비꽃은 내게 고흐로 연결되는 꽃이다. 올해는 눈길 가 닿는 곳마다 양귀비꽃 지천으로 피어있다. 빛깔도 모양도 화려하고 고혹적이다. 십여 년 전 유월 이었다.

프랑스 파리 외곽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우아즈 강위에 있는 오베르 마을, 생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불태웠던 고흐를 찾아 기차를 탔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이국의 낯선 풍경들을 바라보며 도착한 역사는 한산했다. 역사 벽면 해바라기 그림이 고흐의 마을임을 실감케 했다.

몇 마리 백조들 유유히 떠있는 우아즈강, 강물도 고요히 흘러가던 아늑한 시골마을, 역 앞 공원 벤치에 앉아 고흐조각상을 볼 때부터 그의 일생에 설레임과 함께 가슴이 먹먹 해왔다.

요양 차 머문 70여일의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머물고 있는 곳.

오베르성당과 그의 사후 한 번도 임대 된 적 없는 좁고 초라한 라부여인숙, 그림으로 만 보던 그곳에서 그의 열정을 느끼려 그곳의 공기를 큰 숨으로 가슴에 넣었다.

고흐 박물관을 옆 정겨운 골목길 지나, 고흐의 그림 속 까마귀 사라지고 없는 밀밭 길을 아득히 걸으며 밀밭 사이사이 숨은 듯 피어있던 주홍빛 양귀비꽃을 만났다.

인상주의 화가들 정물화에서 보았을 뿐 실제로 양귀비꽃을 본 건 처음이었고 야생으로 피고 지는 꽃은 꽃잎이 작고 키도 낮아 애처로웠다.

요즘 피어있는 강한 빛깔의 양귀비꽃에 비해 부드러운 촉감의 은은한 자태였다. 밀밭 길가 공동묘지, 동생 테오와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는 그의 돌무덤위에 누군가 두고 간 양귀비꽃 시들고 있었다.

불멸의 화가 무덤을 찾아가는 길에 거창한 표지판 하나 없이 소박한 안내표시가 길을 일러주었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마음 기우려 오랫동안 무덤앞을 쉬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숙연해보였다.

묘지를 나와 밀밭길 거닐며 두송이 책갈피에 끼워 가져와 꽃잎 잘 마르도록 정성을 들였다. 몇 번의 작업실 이사를 하면서 꽃잎을 끼워 놓았던 책 어떤 것이었는지 잊어버렸다. 가끔 생각 날 때면 책장 뒤적여 보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찾을 수 없는 것 양귀비 꽃잎만이 아니다.

책갈피에서 빛 바랐을 꽃잎처럼 지나온 삶의 길목마다 희미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흘러가지 않고 마음에 가득 차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게 하던 일과 벅찬 기쁨으로 들떠 있던

순간들도 덧없이 지나간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가슴과 머리가 삶을 견디겠는가.

잊어버릴 수 있는 것, 시간이 주는 자비의 선물이다.

뻐꾸기 우는 산골 동네 어귀에도 양귀비 붉게 피어 산책길 발걸음 머뭇거리게 한다.

전율로 가득한 고흐의 그림 앞에 다시 서게 될 날을 기다리며 양귀비꽃 곁에서 유월의 저녁노을을 바라본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