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기사 “사고 난 줄 몰랐다” vs 경찰 “감지 못할 수가 있나”
-블랙박스 데이터 지워져…데이터복구 의뢰·고의삭제 여부 조사

(동양일보 이도근 기자) 지난 15일 청주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초등학생을 치어 숨지게 한 뒤에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1시간가량 노선을 따라 정상 운행한 시내버스의 블랙박스가 삭제된 것으로 나타나 이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사고를 조사하고 있는 청주흥덕경찰서는 지난 15일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사무소 인근에서 A(60)씨가 몰던 시내버스에 치여 숨진 초등학생 B(11)군의 사고 원인을 밝혀줄 시내버스 블랙박스 저장 장치 데이터가 모두 지워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19일 밝혔다.

경찰은 사고 당시 구호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며 A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차량 혐의를 적용해 형사 입건했으나 A씨는 “사고가 난 줄 몰라 버스운행을 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뺑소니’를 부인하고 있는 운전기사 A씨가 당시 사고를 인지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자 범죄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단서가 블랙박스지만 그러나 사고 당시 상황이 담긴 블랙박스 장치 데이터가 모두 지워진 것으로 나타나면서 경찰은 사고 원인 규명에 애를 먹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A씨는 사고 당일 오후 3시 25분께 평소처럼 시내버스를 몰고 옥산면 어린이보호구역 편도 1차로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같은 시간 B군은 A씨가 몰던 시내버스와 같은 방향으로 도로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이 길은 우측 방향으로 살짝 꺾여 있다. B군은 버스의 우측 앞면 부위에 부딪쳐 현장에서 숨졌다. 그러나 버스는 멈추지 않고 약 1시간 동안 운행을 했다.

A씨는 경찰에서 “사고 당시 버스에 승객 6~7명이 타고 있었으나 이들 모두 아이가 치인 것을 알지 못했고 이상한 점을 감지해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고 진술했다.

사고를 낸 버스기사는 20년 경력의 베테랑으로 사고 당시 음주운전이나 과속을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운행기록장치 분석결과 사고 당시 이 시내버스의 운행속도는 시속 18㎞로 어린이보호구역 제한속도인 30㎞보다 느린 속도였다.

경찰은 그러나 사람이 치어 숨질 정도로 충격이 가해졌음에도 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할 수 있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사고현장 인근 폐쇄회로(CC)TV에서도 사고 직후 목격자 등 주변 상가 주민 5명이 쓰러진 B군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한 주민은 아무 조치 없이 멀어져가는 버스를 향해 멈추라는 손짓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그러나 사고 당시 버스 내부 상황이 담겨 있을 블랙박스 저장장치의 데이터는 모두 지워진 상태여서 경찰은 지워진 데이터를 복구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디지털 포렌식 조사를 의뢰했다. 디지털포렌식은 컴퓨터 등 디지털기기에 저장된 자료를 분석해 법정에 제출할 증거를 확보하는 과학수사 기법이다.

경찰은 A씨가 블랙박스 데이터를 일부러 지웠을 가능성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고 있다.

A씨는 이에 대해 “오류로 인해 영상이 모두 날아간 것 같다”며 고의 삭제 등 인위적인 조작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경찰 관계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지워진 데이터 복원 등을 요청했다”며 “A씨와 버스업체 측 주장과 같이 기계오류로 영상이 저장되지 않은 것인지, 인위적으로 지운 것인지 등도 확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도근·박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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