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오오 쾌활한 새 손님이여! 옛날에 들었던 그 소리 이제 듣고 나는 기뻐한다. 오오 뻐꾸기여! 너를 새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방황하는 소리라고 부를 것인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숲과 풀밭을 헤매었던가. 너는 언제나 희망이었고 사랑이었다. 언제나 그리움이었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워즈워드의 '뻐꾸기에 부쳐' 중 일부)

출판일 때문에 절반은 시내에서 있지만 시골에서 잠을 자며 어설픈 농사꾼 흉내를 내기 시작한지 2년이 되었다. 오늘도 새벽 뻐꾸기 소리에 눈을 떴다. 어린 시절 학교를 오가며 듣던 봄 뻐꾸기 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쟁쟁하다. 맑고 청아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이 들어 있는 그 울음소리! 옛날에도 찔레꽃 필 무렵이면 산천이 타들곤 하였다. 뻐꾸기기가 사는 산도 시름시름하는데 아래 동네 논밭이야 오죽했으랴. 찔레순과 소나무순으로 버티지 못하고 불타는 야산에는 애장이 봉곳 봉곳 늘어났다. 뻐꾸기도 목이 타서 우는데 먼 할머니는 뒷산에 대고 에고, 저 놈 뻐꾸기새끼들 또 우는구나하고 뻐꾸기 탓만 하였다. 죽음을 떠메고 보릿고개를 넘어야하던 시절 어찌 오뉴월 뻐꾸기 소리에 슬픔이 묻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워즈워드는 그 울음소리에서 방황을 감각하였다. 희망과 사랑으로 되어 있는 방랑자의 목소리, 그것들은 언제나 그리움이었으나 모습은 쉽게 들어내지 않고 우리 주변을 맴돌곤 한다.

요즘 밭과 논의 작물은 물을 필요로 하지만 하늘은 비구름을 외면하고 푸른 빛 사이사이로 자외선만 작열시킨다. 잡초마저도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흙바닥에 주저앉아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밭을 한 바퀴 돌지만 발끝에 이슬방울이 부딪치지 않는다.

그런 중에 뻐꾸기 소리는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저들은 우리 곁에 고작 석 달 밖에 머물지 않는다. 서둘러 남의 둥지에 탁란을 하고 새끼들이 크면서 자신을 잊어버릴까봐 노심초사 울며불며 100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남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요즘은 여름마저 성급하게 다가오니 봄꽃을 빨리 보내야 하는 것도 그 서정적인 뻐꾸기 소리를 보내야하는 것도 짧기만 하니 인생마저 봄날처럼 덧없다.

작년에 시골생활을 계획하면서 주변의 나무에다 새집을 걸려고 나무로 만든 새집을 몇 개 구하여 놓았다. 새집 거는 일은 번번이 제초작업 등의 일거리에 밀리다 내 방문 앞에 쌓여서 2년을 맞게 된 것이다. 농사일이라는 것이 꿈같은 여유와 낭만을 즐길 시간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렇게 절실하던 것들이 노숙자 깔개처럼 버려져 있어도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게 되었다.

앗뿔사! 이 일을 어쩔 것인가. 이곳에 할매새 가족이 살림을 차리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 나무 위로 새집을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할미새 가족을 무시하고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었다. 방문도 살며시 열고 발자국도 살며시 딛는다. 어디 이뿐이랴. 개체수가 늘어난 고양이들이 들락거리는데 저들이 알을 지켜낼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알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는 할미새 가족이 살아남는 길이 그들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가 처음 며칠인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던 봄날처럼 세상이 눈감아줄 날들이 지속되기를 운명에게 빌어야 할 것이다.

오늘따라 집 가까운 은행나무에서 뻐꾸기소리가 요란하다. 혹시 할미새 둥지에 알을 몰래 숨기지나 않을지 별별 걱정이 다 내 것이 되었다. 고양에게 몸을 숨기며 알을 낳지만 뻐꾸기가 몰래 탁란을 한다면 뻐꾸기는 자신도 모른 체 가짜 어미 새가 되는 것이다. 뻐꾸기 새끼는 2~3일 먼저 깨어나 할미새알을 밀어내고 가짜 할미새로 자기 정체성을 모른 체 살아 갈 것이다. 나는 이 가짜들의 봄날들을 보개 될 것인가. 아아! 뻐꾸기 소리의 봄날, 인생은 덧없으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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