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석 시인

오래된 일기장의 창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기, 맑고 서늘한 물줄기가 있어
어린 버들치 한 마리 살고 있다
물속에서도 깨밭을 가꾸는 것인지
꼬리를 흔들 때마다 들깨 향이 여울졌다
그 향이 좋아 솜털구름 찾아오면
함께 손잡고 진종일 산 능선 넘나들다가
노을목을 지나 어스름 기슭에서
초록 갈기 날렵한 나사말에 올라타고는
은하의 굽이를 돌아 마침내
삼경三更의 하늘소沼에 이르곤 했다
누구의 솜씨일까, 궁륭 가득 명멸하는
별 무리들, 황홀하여라
부레를 한껏 부풀린 버들치는
별자리 돌고 돌아 문패 달기 여념 없더니
별똥별 길게 꼬리 물던 어느 날 밤
홀연 지느러미 바짝 세우고는
궁륭, 그 깊은 복판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는데

유감스럽게도 이후의 종적을 알 수가 없다
만년필 잉크는 이미 거칠고 탁해졌다
요즘 일기장에선 들깨 향이 나지 않는다

△ 시집 ‘꽃 찾으러 간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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