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석 <시인>

비가 내린다. 앞산 날망에도 내리고 뒷산 모롱이에도 내린다. 논밭을 건너면서도 내리고 울타리를 넘으면서도 내린다. 지붕에도 내리고 마당에도 내리고 텃밭에도 내린다.

텃밭에 내리는 빗줄기는 등이 굽었다. 어머니처럼 등이 굽었다. 멀리 떠나보지도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만 바장이더니 기어코 등이 굽었다. 콜록콜록 등이 굽었다.

굽어 내리는 빗줄기는 말릴 틈도 없이 굽어 내린다. 이제는 몇 포기 남지 않은 생(生)의 이랑 위로 하염없이 굽어 내린다. 텃밭에 내리는 빗줄기는 그렁그렁 젖어 있다.

젖은 빗줄기가 연화사(蓮花寺)를 오른다. 아슴아슴한 비안개 속이다.

이미 예견하신 것일까? 청회색 줄무늬 다듬잇돌 위에 황톳빛 삼베가 정갈하다. 어머니, 방망이를 집어 드신다. 딱딱 따다닥, 방망이질이 초연하다. 낙숫물이 찰방, 합장을 한다.

“이 세상 올 때도 이 때깔이었고, 이 세상 뜰 때도 이 때깔 아니겠냐?”

어머니의 말소리가 낮게 깔린다. 때 이른 저녁연기처럼 한 계단 한 계단 섬돌을 흘러내린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외경(畏敬)의 음색이다.

“이상도 하지.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낮은 데로 흐르다 보면 게가 바로 하늘이거든.”

방망이질을 멈춘 눈길이 멀다. 그 눈길, 너무 아득하여 감히 다다를 수가 없다.

“이젠 이게 나의 마지막 옷이 되겠구나.”

어머니는 그렇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옷을 손수 지으셨다. 생각해 보면 몇 겁 윤회의 강을 건너 이승에 오셨을 터인데, 왜 그토록 서두셨던 것일까? 참으로 지극히도 짧은 이승의 엿보기였다. 야속하여라, 목숨으로는 오갈 수 없는 나라.

비가 내린다. 대문을 나서도 비가 내리고 기슭을 올라도 비가 내린다. 불이문(不二門)에도 내리고 명부전에도 내리고 연화사에도 내린다.

불이문까지 마중 나온 어머니는 황톳빛 법복을 입으셨다. 정성껏 다듬이질 한 탓인지 결이 곱고 부드럽다. 무슨 조홧속인지 우산 없이도 젖지 않는다. 다짜고짜 손목 잡아 이끌기에 명부전 시왕님께 삼가 절한 후, 풍경소릴 벗 삼아 석탑 길 걸어보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어떠냐고, 그토록 서둘러 서역 나라로 떠나시더니 그곳은 어떠냐고, 이것저것 묻고도 싶은데 일언(一言)이 없다.

함께 돌아가자, 말을 할까? 그러나 부질없다. 생사(生死)의 윤회를 어찌하랴. 슬며시 젖어드는 눈빛, 한 잔 감로수로 식히고 돌아서는데, 빗방울 세고 세며 차마 돌아서는데, 매정하셔라.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기척이 없으시다. 이것저것 먹을 것도 안 챙겨 주시고, 잘 가라 말 한 마디 배웅도 없으시다.

그만 서운하여 냅다 불이문(不二門)을 나서는데, 울컥, 눈물이 난다.

그런데 저 분은 누구신가? 나보다 먼저 문을 나와 저만큼서 어서 오라 손 흔드는 저 여인은, 황토빛 법복을 입은.

아, 삶과 죽음은 본래 불이(不二)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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