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호 <수필가>

아, 얼마나 그리운 시였던가. 아, 얼마나 마음 놓고 부르고 외치고 싶던 시였던가. 그리움에 사무치고 보고 또 보던 시편들이었던가.

1988년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지용제’ㅡ정지용시 잔치판이 벌어지고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모여 시를 낭송하고 노래하고 창으로 부르고 춤으로 몸짓으로 맘껏 표현하고 있었다.

청계천 헌 책방에서 용케 구한 정지용 시집을 불온서적 보듯 몰래 야금야금 음미하다가 이제는 내놓고 자랑스레 떠벌릴 수도 있는 선포식이 되었다. 문단의 공백기에 묻혀 있던 납월북 작가들이 해금되는 이 날이 해방일이 되었다.(해금은 1988년 3월 31일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시인 정한모 문공부장관이 들어서면서 비롯되었다.)

처음 ‘지용제’ 행사가 있다는 짤막한 신문 기사를 보자마자 짝사랑 만나듯 설레는 마음으로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서울 사는 글벗 H 시인을 불러내어 함께 참석하여 ‘지용회’에도 들고 멋진 공연의 귀빈이 되는 기쁨을 누렸다.

와, 시도 이렇게 다양하게 감동을 주는 무대를 마련할 수 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지용의 시 ‘고향’이 채동선 멋진 곡으로 다시 살아났다. 하긴 곡은 그대로고 시를 금지된 지용 것이 아닌 이은상의 ‘그리워’로 바꾸어 부르다 이제야 원시로 환원한 날이다. ‘향수’ 시는 김희갑 작곡으로 테너와 대중가수인 박인수ㅡ이동원이 처음 불러 인기를 모았다.

한 달 후, 1988년 6월 25일에는 지용의 고향 옥천에서 제대로 1회 ‘지용제’를 관성회관에서 열었다.

지용의 생일이 음력 5월 15일인데 양력으로는 6월 25일로 환산하여 생일에 고향 축제를 연 것이다. 다음 해부터는 꽃이 만발하는 5월 중순이면 으레 열려 이제 30회나 되었다.

당시 옥천문화원 박효근 원장과 문인들의 열성이 전국적인 문학제로 발전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1회 ‘지용제’에는 서울에서 박두진, 김남조, 이근배 등 문인들뿐 아니라 당시 인기 높던 박경리 원작 드라마 ‘토지’의 출연진들이 두 대의 버스로 대거 참석하여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청주에서 옥천은 동양일보 버스가 축제 동안 여러 해 운행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가기도 했다. 귀가길에서 아버지는 마이크를 잡더니 지용과 얽힌 귀중한 일화도 들려주셨다. 해방 후 형님인 조벽암 시인과 함께 건설출판사를 운영하였는데 ‘정지용시집’을 발간할 때 표지화를 이주홍 작가에게 부탁하여 받아오기도 하셨고, 정지용 시인은 당시 북아현동 같은 집에 기거하셨다고. 아침마다 식모가 지용 시인의 방을 청소하며 비과 등 과자 껍데기와 원고 파지가 수북하여 투덜대곤 했다고. 글 쓰느라 고뇌한 흔적인데.

올해로 ‘지용제 30년’이 되고 보니 그 동안 1회 행사에 참여했던 박두진 원로 시인과 만년 문학청년생이시던 아버지도 떠나시고 시를 줄줄 잘 외던 김수남 명예시인 사회자, 깜찍한 재치로 분위기 잡던 길은정 사회자들도 고인이 되었다. 그 30년에 지용만큼 걸출한 시인이 출현하진 못했으나 모두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보듬는 풍토는 이뤄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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