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 새 간부의 조직과 인선(2)

경무국장은 경시청의 부장이었던 노구치준키치(野口 淳吉)군을 맡길 생각으로 노구치군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노구치군도 곰곰이 생각한 후 결국 승낙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무국장과 경무국장은 결정되었습니다. 식산국장직은 니시무라야스키치(西村 保吉)군에게 맡겼습니다. 당시 그는 사이타마현(埼玉縣)의 지사로 있었는데 스스로 “미즈노씨가 조선에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전부터 매우 많은 신세를 졌던 미즈노씨를 위하는 일이라면 나도 조그마한 힘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만일 미즈노씨가 원하신다면 나는 조선에 가는 것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모리야군에게 들었기 때문에 재빨리 니시무라군을 식산국장으로 결정했습니다. 학무국장직은 아카이케군의 의견에 따라서 시바타젠사부로(紫田 善三郞)군을 추천했습니다. 그는 지금 오사카부(大阪府)의 내무부장을 하고 있지만 별로 그 직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니 그를 발탁해 국장에 채용하심이 어떠하냐고 물어 왔고, 또 나도 일찍이 시바타군의 일은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조선행을 응하기만 한다면, 그를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했지요. 그래서 아카이케군이 직접 시바타군에게 이야기했더니 시바타군도 반가워하며 기꺼이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시바타군을 학무국장으로 결정했습니다.

실은 금번 총독부 관제개정에 있어 반드시 이전에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교체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우사미가츠오(宇佐美 勝夫)씨나, 세키야테이사브로(關屋 貞三郞)씨, 오바라신조(小原 新三)씨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나도 그의 수완이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을 그만 두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에 즈음하여 이전부터 관계가 있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오히려 본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고, 또한 모든 일을 일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사람들에게는 매우 안됐지만 그만 두게 했던 것입니다.

우사미 같은 사람은 스스로 나서서 “이번 기회에 우리들은 물러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제도 하에 새로운 정치를 하는데 있어 과거 인물들이 버티고 있으면 개혁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또 우리들도 이전부터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새 정치 방침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 것이어서 서로를 위해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사표를 제출해 왔습니다. 우사미군은 조선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그 사정에 밝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보를 격의 없이 우리들에게 제공해 주며 앞으로의 정치에 참고가 되도록 해 주었습니다. 스스로 그만두면서까지 미리 닥쳐올 일까지 이렇게 세심하게 걱정해 주었던 그의 성의에 대해 나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세키야군은 예로부터 잘 아는 사이이고, 특히 식민지 행정에 대해서는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사람만큼은 남겨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지금 말한 것 같은 사정에서 일본의 지사직과 교체하기로 하고 아카이케군의 후임인 시즈오카현 지사로 추천하자 하라타카시 수상은 곧 승낙해 주었습니다. 당시 식산국장이었던 오바다군도 일본지사로 전보해 달라고 내무성에 말했지만 지금 일시에 두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곤란하니까 차기까지 기다려 달라는 내무성의 의견이 있어 그로 인해 그는 당분간 공직에서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후 곧 와카야마현(和歌山縣) 지사로 채용되었습니다. 그 후 우시미군도 하라다카시 수상에게 간청하여 도쿄(東京)지사로 채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조선에 근무하면서 고군분투한 사람들을 그만두게 하는 것은 내 본의가 아니었지만 이들이 제각기 원하는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 경찰제도의 조직 및 개정

다음에는 경찰제도를 개정함에 있어 경무국의 과장이나 지방의 경찰부장을 인선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노구치군과 아카이케군·모리야군이 온 힘을 기울여 일본에서 지방관으로 유망한 인물을 물색했습니다. 아카이케군이 진력한 덕분으로 경무국에는 마루야마츠루기치(丸山 鶴吉)군·시라가미유키치(白山 祐吉)군을 임용하기로 했습니다. 13도의 경찰부장을 각 방면에서 물색하였는데 경기도 경찰부장은 경시총감 격이고, 아주 중요한 직위입니다. 당시 노구치군이 경무국장으로 내정되었기 때문에 노구치군이 각 방면에서 인선해 보았지만, 이를 인선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나는 후지누마시오헤이(藤沼 壓平)군에게 이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후지누마군은 “모처럼 권하신 일이니까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제가 지금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가기에는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라고 거절하더군요. 모리야군도 심히 걱정을 했지만 적임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아키다현(秋田縣) 경찰 부장이었던 치바료(千葉 了)군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치바군도 매우 주저했지만 “어쨌든 조선의 동란이 진정될 때까지 즉 금년 12월경까지라면 가겠습니다. 그러나 그 후가 되면 꼭 일본으로 다시 돌려보내 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말하고 그를 경기도 경찰부장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어 경상남도에는 야기린사쿠(八木 林作)군, 경상북도에는 신죠유지로(新壓 祐次郞)군, 충청남도에는 세키미즈타케시(關水 武)군, 충청북도에는 야마구치야스노리(山口 安憲)군, 전라남도에는 야마시타겐이치(山下 謙一)군, 전라북도에는 마츠무라마츠모리(松村 松盛)군, 황해도에는 우마노세이이치(馬野 精一)군, 강원도에는 이시구로히테히코(石黑 英彦)군을 경찰부장으로 각각 임명했습니다. 또 경무국에는 노구치군을 국장으로 하여 마루야마츠루기치, 시라가미유키치군을 경무국 과장에 후루하시타쿠시로(古橋 卓四郞)군을 경찰관 강습소장에 임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앙과 지방의 수뇌부 조직은 짜였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많은 곤란이 따랐습니다. 이들 제군은 일본 지방관으로서 우수한 인재들이었고 지방에서 제각기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조선에 와서 일해 달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조선 사정을 설명한 다음 국가를 위해 분발해 달라고 간절하게 설득했기 때문에 그들도 감격하여 결국은 승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우수한 분들이 조선에 와서 일신을 국가를 위해 분투해 준 덕분에 조선 경찰계도 긴장하게 되었고 그렇게도 혼란했던 전 조선의 치안이 단시일 내에 평화 상태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지방경찰 조직에 들어갔는데 이는 더욱더 큰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당시 헌병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도로 변경한 결과 새 경부·순사들을 일본에서 데려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3도에 배치할 경찰관이 과연 그렇게 짧은 시일 내에 갖추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가 가장 걱정했던 문제였습니다. 특히 당시의 조선 내에는 심한 분규와 소요가 있었던 때였고 만일 경찰의 배치가 어렵다 고해서 자칫 잘못하면 치안유지 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특별히 역점을 두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실은 하라다카시 수상에게 이런 말까지도 했습니다. “경찰제도를 헌병제도에서 보통경찰제도로 바꾼다는 것은 지극히 지당하신 생각이고, 나도 또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관제발표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관제가 발표되면 헌병 대신에 보통경찰관을 배치해야 하는데, 보통경찰관 즉 경부(警部)·순사(巡査)를 그렇게 급히 모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대부분은 일본 경부·순사 중에서 뽑아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각하께서는 이를 배려해 주실 것인지요?”라고 말하자 하라다카시 수상은 “그것은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 만약 그 때까지 경찰관 수가 다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는 일본 각부(各府)와 현(縣)에 임시 출장 명령을 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수가 갖추어지도록 하겠다. 이는 내가 직접 내무대신에게 명해서 하도록 하겠다.”는 언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라다카시 수상의 말대로 실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경무국장인 노구치군이 경시청 제1부장이었기 때문에 경시청사람들을 많이 임용하려 하자 이에 대해 경시총감이었던 오카(岡)군이 강경하게 항의해 왔습니다. “나는 노구치군을 빼 가는 것조차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에다 동경 시내 경찰서에 있는 유력한 사람들을 모두 빼 간다는 식이니 경시총감인 나로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어요. 조선의 일도 국가를 위해 중요한 일이지만 도내의 경찰은 더욱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도내의 경찰사무를 관장하고 있는 중요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조선으로 빼가게 되면 도경찰(都警察)에 커다란 결함이 생기게 되고 경시총감으로서 책임을 질 수 없게 되지 않겠소.”하고 내무대신에게 항의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경찰을 조직하는데 엄청난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라다카시 수상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오카 경시총감이 하는 말도 너무나 지당한 말이지만, 지금의 조선 사정은 분란이 극에 달한 상황이니까 이 점은 특히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각하께서 일전에 조선경찰 조직이 어렵게 되면 각 지방에 훈령을 내서라도 명령하여 어떻게라도 해보겠다고 말씀하셨듯이 각별한 각하의 배려를 바라는 바입니다”고 말했습니다. 하라다카시 수상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라고 말하며 특히 오카 경시총감에게 한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에 당시 경시청 경부·순사 중에서 조선에 차출된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노구치군은 경무국장으로써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조선경찰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때문이었는지 도쿄를 떠나 타지로 가는 도중 고베(神戶)에서 갑작스럽게 발병하여 열이 39도에서 4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상황에 처해 고베 시에 있는 친척집에서 요양하게 되었습니다. 병명도 모르고 총독·총감과 함께 부임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였기 때문에 출발을 연기하여 요양하기로 했습니다.

총독과 나는 8월27일 도쿄를 출발하여 이세신궁(伊勢神宮), 모모야마고료우(桃山御陵)를 참배하고 부임하려 했지만, 교토에 도착한 날 밤에 경성으로부터 불온한 전보가 잇달아 왔습니다. 경무국장이 시급히 부임하셔야 되겠다는 전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구치군이 병환 중에 있으니 급히 부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경무국장 대리를 발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카이케군은 내무 국장이었지만, 그에게 임시 경무국장을 명해 모든 업무처리를 하도록 지시하고 아카이케군을 곧 출발시켰습니다.

그날 밤 아카이케군은 도쿄를 출발하여 교토에 도착했고 곧 바로 경찰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급한 상황에서의 일이었기 때문에 경성(京城)에서는 경무국장 대리라는 것도 잘 모르고 있었으므로 매우 괴로웠다는 것입니다. 그 후 노구치군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결국 조선에 부임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노구치군은 조선에 가서 치안 업무를 직접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새 경찰을 조직하는데 있어서는 더할 수 없는 고심을 다했고 이로 인해 병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통석의 정을 느끼는 바입니다. 그는 조선 총독부의 첫 번째 경무국장으로 조선 경찰 조직에 공헌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그 공적을 기억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